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송병선 옮김, 민음사 2011
열일곱 편의 단편소설집 이름을 아예 「픽션들」이라고 했는데도, 허구적 인물과 함께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스토리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현학적·철학적이기도 하다. 각주들이 있어서 더 그렇다.
충분한 설명을 해주는데도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꿈같기도 한 줄거리에 호기심으로 따라가게 하고 뜻하지 않은 결말을 기대하게 한다.
고양이의 새까만 털을 쓰다듬는 동안, 그는 그 감촉이 꿈이며 자기와 고양이는 마치 유리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인간은 시간 가운데, 즉 연속성 가운데 살고 있지만, 마술적인 동물은 현재에, 즉 순간의 영원 속에 살기 때문이었다.
이건 「남부」에 나오는 문장이다.(221)
이 문장과 대비되는 이야기도 있다. 「비밀의 기적」이라는 작품이다.
1939년 3월 19일 해질 무렵, 게슈타포는 어머니가 유대인인 작가 야로미르 홀라딕을 프라하 첼레트나 거리의 아파트에서 체포하고 열흘 후인 3월 29일 오전 9시에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홀라딕은 총살형에 대한 절대적인 공포감을 달래며 그의 희곡 「적들」을 완성하고 싶어한다
사형 집행일 여명이 틀 무렵, 그는 클레멘티눔 도서관의 한 서고에 숨어 있는 꿈을 꾸었고, 그 꿈속에서 세상의 모든 곳에 존재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네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노라."
사형 집행 시간이 다가오자 두 명의 군인이 감방 안으로 들어와 그를 끌고 갔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다음과 같다.
물리적인 세계는 멈추었다.
무기들이 모두 홀라딕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를 죽일 사람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사관의 팔은 아직 마치지 못한 움직임 그대로 영영 얼어붙어 있었다. 벌 한 마리가 마당의 보도 위에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바람은 꼭 그림 속에서처럼 멈춰 있었다. 홀라딕은 소리를 질러 보고, 한마디 말을 뱉어 보고, 한 손을 움직여 보려고 시도했다. 그는 자기 몸이 마비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지된 세계에서는 아주 작은 소리조차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나는 지옥에 있어. 나는 죽었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는 미쳤어.'라고 생각했다. 또한 '시간이 멈춰 버렸어.'라고도 생각했다. 그러자 그는 만일 그런 것이 사실이라면, 자기의 생각도 멈추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추측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베르길리우스*의 신비스럽기 그지없는 네 번째 목가시를 되풀이해서 읊었다. 그리고 이제는 저 멀리 있는 군인들도 자기의 번민을 함께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는 그들과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자기가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데도 전혀 피로하지도 않고, 아무런 어지러움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에 놀랐다. 헤아리기 힘든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잠에 빠졌다. 그가 깨어났을 때에도 세상은 계속 움직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의 뺨에는 빗방울 하나가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마당에는 벌의 그림자도 그대로 있었다. 또 다른 하루가 지나갔지만, 그는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신에게 자기의 작업을 끝낼 수 있도록 꼬박 일 년이라는 기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그에게 일 년을 부여했다. 하느님은 그에게 비밀의 기적을 내렸다. 독일군의 탄환은 정해진 시간에 그를 죽일 것이었지만, 하사관이 명령을 내리고 군인들이 명령을 실행하는 사이에 그의 마음속에서는 일 년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당혹감에서 무감각의 상태로, 무감각이 상태에서 체념으로, 체념에서 갑작스러운 감사의 마음으로 옮겨 갔다.
그는 기억 이외의 그 어떤 문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덧붙이고 있던 6음절의 운문을 하나하나 익혀야만 했다. 그것은 그에게 애매하고 덧없는 문구를 시도해 보다가 잊어버리고 마는 미숙한 사람들은 상상도 해 보지 못했을 엄격한 훈련을 요구했는데 그건 일종의 행운이었다. 그것은 후대들을 위한 작업도, 어떤 문학적 취향의 소유자인지 모를 하느님을 위한 작업도 아니었다. 그는 시간 속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세심하고 비밀스럽게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고상한 미로를 만들었다. 그는 3막을 두 번씩이나 고쳤다. 그리고 반복되는 종소리나 음악처럼 너무나 분명한 상징을 지워 버렸다. 어떤 세부적인 것도 그를 애먹이지 않았다. 그는 잘라 내고, 축약하고, 확장시켰다. 어떤 경우에는 원본을 그대로 선택하기도 했다. 그는 마당과 교도소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어떤 얼굴이 뢰머슈타트**의 성격에 대한 그의 생각을 수정시켰다. 그는 플로베르를 그토록 놀라게 만들었던 불협화음이 단지 시각적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소리 나는 말이 아닌 글자로 적힌 글이 지닌 약점이자 불쾌감이었다……. 그는 자기의 희곡을 완성했다. 이제 단 하나의 성질 형용사를 해결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것을 찾아냈다. 그러자 그의 뺨에서 빗방울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고, 얼굴을 마구 흔들었고, 네 번에 걸친 일제 사격에 쓰러지고 말았다.
야로미르 홀라딕은 3월 29일 아침 9시 2분에 죽었다.
이것은 "우리가 궁극적인 진리라고 믿고 섬기고 있는 것도 우리가 만들어낸 '우상'일뿐"이라는 탈구조주의 사고의 사례일까?
혹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보여주는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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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us Vergilius Maro(기원전 70~기원전 19). 고대 로마의 시인
** 야로미르 홀라딕의 희곡 「적들」에 나오는 남작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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