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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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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 2

by 답설재 2025. 2. 18.

 

 

 

 

최인호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 2

여백 2013

 

 

 

최초의 남자가 경아를 망가뜨렸듯이 두 번째 남자 만준도 음습하고 우울한 생활 속으로 경아를 밀어 넣어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경아를 한 번 더 파괴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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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버려진 경아는 술집을 전전하는 생활을 하게 되고, 술 없이는 한시도 숨 쉴 수 없는, 술을 마시면 종달새처럼 지저귀고 노래하는 여인이 되었다.

세상의 사내들은 아름다운 경아의 성을 가지고 싶어 집요하게 다가가고, 함부로 소유했다가 함부로 짓밟고 버린다.

그림을 그리는 화자(김문오)도 그 사내들 중 하나였다.

문오도 경아를 사랑했다. 문오가 경아를 사랑했으므로 경아도 문오를 사랑했다. 그러나 동거생활까지 한 문오의 사랑은 경아의 사랑과 다른 사랑이었다.

 

나의 외로움, 나의 슬픔, 나의 고독, 나의 깊은 권태, 내 곁에 빚어지는 모든 육욕과 끓어오르는 환락에 대해서 나는 끊임없이 초조해하고, 기웃거리고,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조그만 나의 경아에게 나의 모든 초조함을 그녀의 섹스 속에 사정해 버리듯 털어놓고, 나는 본래의 나로 돌아가려고 천연덕스러운 친절과 적당한 웃음을 연기하고 있을지 모른다.(225)

 

나는 경아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경아는 말하자면, 내가 한때 사랑을 하고 몸을 나누고 그런 여인으로 남아 있느니보다는 내 몸을 흐르는 도시적인 기질 속에 용해된 도시의 그림자에 불과하였던 것이다.(325)

 

경아와 헤어져 고향으로 내려간 문오가 그림에 대한 회의, 자기 자신에 대한 좌절감, 재능에 대한 절망감, 슬픔을 극복하고 대학 강사가 되어 다시 서울을 찾았을 때, 경아는 이제 가망 없는 여인으로 전락해 버린 상태였다. 미워지고 추해져 있었다.

 

그해 겨울 눈 오는 날 늦은 밤, 경아는 술에 취해 수면제 과용으로 눈밭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문오가 장례를 치른다.

아름다운 여인 경아는 그 시대를 함께 살아가며 만난 사내들의 청춘의 제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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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 전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처럼 새삼스럽게 다가온 낯익은 대화가 있다. 경아와 문오의 대화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난 이제 지쳤어요."

"무슨 소리야, 아직 어리면서, 스물일곱밖에 안되었으면서."

"늦었어요, 새로 시작하기엔 늦었어요. 내겐 희망도 없어요."

"아무것도 믿지 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믿지 마라, 네 곁에 누워 있는 나 자신도 믿지 마라. 나는 네 몸에 뿌리박고 크는 나무에 불과해."

"내가 열아홉 살 때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나 연애를 걸었을 때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믿지 않았어요. 그러나 지금은 믿어요. 그러니까 내가 살아요. 난 남자가 없으면 못 살 것만 같아요. 여자란 건 참 이상하게두 남자에 의해서 잘잘못이 가려져요. 한때는 나도 결혼을 하고 남편을 위한 밥을 짓고 밤마다 예쁜 잠옷도 입었었어요."

"꿈에 불과해. 지나간 것은 모두 꿈에 불과해."

"꿈이라도 아름다운 꿈이에요. 내겐 소중해요. 소중한 꿈이에요. 또 내 몸을 스쳐간 모든 사람이 차라리 사랑스러워요. 내 몸엔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그들이 한때는 날 사랑하고 그들이 한때는 슬퍼하던 그림자가 내 살 어딘가에 박혀 있어요."

경아의 두 손이 다정스레 내 머리칼을 감싸 들었다.

"생각이 닿는 곳마다 모두 아름다운 기억들뿐이에요. 지금은 다들 무엇을 하고 지낼까?"

(...)

"나 이담에 죽으면 나비가 될 테예요. 초봄에 눈에 띄는 노랑나비가 될 테예요. 그래서 땅을 짚고 걸어 다니지는 않을 테예요. 점쟁이 말처럼 훨훨 날아만 다닐 테예요."

(...) (376~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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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처음 읽을 그즈음에는 상업주의 소설, 대중소설(통속 소설), 호스티스 문학 같은 말들이 있었다. 상업주의 문학이란 더럽고 야비하다는 의미였다. 요즘은 그런 말을 드러내놓고 하진 않는 것 같다.

그 젊음의 날에 나는 이 '상업주의 소설'을 정신없이 읽었고 그런 날들을 이어와서 지금 나이 들어가며 또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