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삶의 다양한 시기가 동시에 공존하는 듯한, 그래서 어렸을 때 살던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로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하기 짝이 없는 느낌'
《일의 기쁨과 슬픔》(알랭 드 보통)에서 발견한 문장이야(230).
다른 사람도 그렇구나 생각했어.
넌 어때?
그런 느낌 가질 때가 없니?
까마득하게 된 그 학교에 가면 그때 그 사람들이 좀 서먹하긴 해도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녔는지 물을 것 같아.
가고 온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 있을 것 같기도 해.
교사(校舍) 앞 벚나무 아래 상을 차려 놓고 막걸리를 마셨어. 술잔에 꽃잎이 떨어지면 마시자고 했어. 봄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면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다들 잔을 들었어.
아직 전기도 들어오지 않을 때였어. 교장과 맞설 일이 있어서 저녁에 청부가 촛불을 켜놓은 교장실에 내가 먼저 들어가 기다렸는데 교감이 오더니 그냥 퇴근하자고 했어. 교장이 나를 좋아하는 것 알지 않느냐고, 교장은 나와 다투기 싫어한다고 전했어. 무서운 교장이어서 아무도 고개를 들지 못했는데, 참 미안했어.
그곳 이야기만 해도 충분할 것 같아.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취향이 달라서 적응하기가 어려운 곳도 있었어. 어쩌면 거의 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해.
그런 학교도 그때 그 사람들은 언젠가는 내가 나타날 거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 같아.
일만 하고 싶어 하는 내 옆에서 끊임없이 실없는 농담을 해주던 그 선배는 나를 무척 기다릴 것 같아.
그렇게 일만 해서 어떻게 하느냐며 집으로 보약을 갖다 준 누나 같은 선배,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주면 좋겠다는 선배.....
아, 나는 그런 사람들을 다 열거하기가 싫어.
그냥 내 가슴속에만 넣어둘게.
내가 "형님" "형님" 하며 따르던, 그 훌륭하신 선배는 요즘 아무래도 이상해. 여전히 다정하지만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해. 형수님은 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되었고, 아들이 둘 있지만 요즘은 고령(高齡)에도 거의들 혼자 지내잖아. 어떻게 하지?
그곳 역에 도착하면 사람들이 마중을 나올 것 같은 느낌이지만, 이제 그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없다는 걸 나도 잘 알아.
아, 이런 이야기 길게 할 수 없어.
그만둘게.
이런 글로 '작품'을 만들 일도 없잖아. 알랭 드 보통의 저 문장을 발견하면서 단편적으로 떠오르곤 하던 기억 몇 가지만 메모해 놓고 싶었을 뿐이야.
이야기하다가 마는 것 같아서 미안해.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로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하기 짝이 없는 느낌"
이 느낌......
그만둘게.
자꾸 들추어내는 것 지긋지긋해.
다짐할게. 이제 사람들 만나도 옛날 얘긴 하지 않겠다고 다짐할게. 무슨 일화 같은 것 떠오르면 얼른 버트런드 러셀을 떠올릴게. 꼭 그렇게 할게.
이제 그만둘게.
그냥 넣어둘게. 가지고 갈게.
'내가 만난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이 온 날 밤, 이곳과 그곳에 바로 눈이 내렸네 (4) | 2024.11.27 |
---|---|
아무래도 겨울 (12) | 2024.11.26 |
지금 세상이 추구하고 희망하는 것 (4) | 2024.11.19 |
시월과 십일월 (8) | 2024.11.18 |
"전에 알던 여자애들은..."(카뮈) (12) | 2024.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