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아! 벌써 오십 년이 다 되었지? 아침마다 우리가 그 교실에서 만나던 날들… 넌 습관적으로 내 표정을 살폈지. 그 모습이 왜 잊히지 않는지…
성적이 좋지 않았던 넌 6학년 때에도 내내 그대로였어. 아이들은 웃거나 놀리지도 않고 그냥 ‘꼴찌’라고만 했지. 당연한 일이어서 비웃거나 놀리거나 할 일이 아니라고 여겼겠지. 넌 주눅이 들어 있었어. 학교는 주눅이 드는 곳? 네가 처음부터 내 표정을 살펴보며 지낸 건 학교에 주눅이 들어서였던 것이 분명해. 담임이란 언제 어떤 언짢은 소리를 할지 모르는 존재였겠지.
너의 그 표정은 내내 변하지 않았어. 졸업하고는 마음이 편해졌을까? 주눅 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렇지만 일찌감치 사회로 나갔고 꼬박꼬박 학력(學歷)을 묻는 이 사회 어디서나 ‘초등학교 졸업’이라고 대답하며 주눅 든 그 6년을 떠올렸겠지. ‘꼴찌’라는 덧붙임이 없어서 다행이었을까?
“쌤, 잘 계시나요? 좋은 건 아니지만 남편과 산에 가서 채취한 두릅과 머위나물 장아찌 담앗어요. 맛은 있을지 모르지만 드셔보세요. 건강하시고 죽지 마세요~ 꼭 찻아뵐께요. 사랑합니다”
소포 받고 혼자 으스댔지. 네 편지 보고 우리글 맞춤법은 본래 너무 까다롭다고 못마땅하게 여기게 되었고, 돈 잘 버는 제자가 사주는 음식, 선물보다 이 반찬이 훨씬 낫구나 싶었지. 그러다가 네가 정말로 찾아오겠다고 했을 땐 가슴이 철렁했어. 남해안에서 여기까지? 그것도 그렇지만 왜? 왜 오려는 걸까? 왜 공부를 잘 가르쳐주지 않았느냐고, 꼴찌를 면하게 해주지 않았느냐고 따지려는 건 아닐까?
약속한 식당에서 만나 내가 물었지? 넌 어처구니없어했고. “혹 내가 널 때린 적이 있었니?” 이렇게 말하는 건 부끄럽고 도리도 아니지만 그땐 걸핏하면 그랬으니까. 오랜 세월이 흐르고 마침내 그걸 금지하자고 했을 때도 어떤 교육자는 ‘사랑의 매’로 계속 좀 때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까.
넌 조선소에 다닌다고 했어. “배를 만드는구나!” “아니요, 선생님!” “그럼 누가 만들어?” “…” “사장도 직접 만들진 않아. 그러니까 함께 만드는 거야” “전 외국인을 포함해서 몇 명의 조원을 데리고 제가 맡은 일만 하는데, 죄송하지만 쌍욕도 하고 그래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아요” “그 잘하네!”
숙아! 이제 꼭 해야 할 말을 할게. 어린 시절 네가 내 앞에서 주눅이 들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너에게 주눅이 들어가고 있는 걸 느껴. 어처구니없게도 교단생활을 끝내고 너를 다시 만나면서 그렇게 되었어. 못난 교육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해도 되겠지만 어이없게도 난 아무래도 너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준 게 없기 때문이야. 맞춤법도 가르치지 못했지만, 인연의 소중함이나 사랑도 가르치지 못했고 네가 장차 조선소에서 온갖 사람들과 어우러져 쌍욕도 하며 살리라는 건 염두에 없었어.
학교란 게 뭘 하는 곳일까? 공부를 해서 기억하고 익힌 것들은, 도대체 어디에 쓰이는 것일까? 그동안 묻고 대답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으로 여겼던 것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어. 학교는 교육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지식을 많이 갖게 해주는 곳이라고 대답하겠지? 지식을 많이 가질수록 더 잘 살 수 있다고 하겠지? 나는 지금 바로 그것에 대해 회의적이야.
이렇게 가르치고 배워서는 안 된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교육계 지도자들, 한 치 변함이 없는 이 나라 교육, 이렇게 가르치고 배우는 건 학생들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아무리 외쳐도 아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 교육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어.
그때 그 교실에서 네 생각은 어떤지 물어본 적이 없어서 미안해. 궁금한 건 없는지, 너무 많다면 몇 가지라도 말해보라고 하지 못한 것도 미안해. 누구를 좋아하고 사랑하는지 물어보지 못한 것도 미안해. 무얼 하고 싶은지 물어보지 못해서 미안해. 장차 뭘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물어본 적이 없어서 정말 미안해. 누구의 어떤 점이 부럽고, 너의 어떤 점이 자랑스러운지 물어보지 못해서 너무너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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