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사라지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지식은 단 한 문장, 한 문장이 안 된다면 그럼 한 단어, 단어도 길어서는 안 된다면 단 두어 글자로 된 단어, 그것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사랑?
믿음?
힘? 돈?
기억 혹은 추억? 고독? 향수?
상상력 혹은 추리력?......
나로선 도무지 재미가 없지만 유명한 어느 과학자는 그게 '원자 가설'이라고 했단다.
# 1
1960년대 초, 아주 비범한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어떤 대격변이 일어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 지식이 모두 파손되고 오직 한 문장만이 남아 다음 세대의 피조물에 전해지게 된다면, 가장 적은 글자 수에 가장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요? 나는 원자 가설(혹은 원자에 관한 사실, 아니면 무엇이라 부르건 간에)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모든 것이 원자라고 하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조금 떨어져 있으면 서로 끌어당기지만 너무 밀착되어 있으면 밀어내는 아주 작은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말입니다. 약간의 상상력과 사고력을 발휘해 본다면, 이 한 문장 안에 온 세상에 대한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가 들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우아한 우주》라는 책에서 이 글을 읽었는데 정말 그런가 싶었다. 내겐 물리학에 대한 기초가 없어서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것이겠지만 그걸 이해하고 실감해보고 싶었다. '원자란 게 도대체 뭘까?'
# 2
내 친구 물리학자를 만났을 때 넌지시 물어보았다. 지금은 또 다 잊어버렸지만 그는 내게 상대성 원리에 대해서도 단 10분 만에 쉽게 이야기해 주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렇게 해주기를 기대했지만 그는 별 것 아니라는 듯 혹은 그건 아주 당연해서 이야깃거리가 되지도 않는다는 듯 단 한마디로 대답해 버렸다.
"아, 그럼요!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리고는 끝이었다('아, 이런...').
정말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 것일까?
내 친구가 이젠 너무 늙어서 설명해주고 싶은 마음도 다 사라졌나?
정말 그는 30분째 메뉴판만 들여다보며 뭘 먹으면 직성이 풀릴까, 그 생각에만 골똘한 것 같았다.
# 3
그러다가 《어른을 일깨우는 아이들의 위대한 질문》(제마 엘윈 해리스)이라는 책에서 원자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원자란 무엇인가요?' 아이들이 보는 책이니까 당연히 쉽게 설명되어 있을 것이었다.
원자란 이 세상 모든 것을 만드는 벽돌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나, 나무, 심지어 우리가 숨 쉬는 공기까지 모두 원자로 만들어져 있어요. 원자는 눈에 보이지 않아요. 너무 작기 때문이지요. 이 문장 끝에 나오는 느낌표의 점의 지름을 가로지르려면 원자 1000만 개를 한 줄로 세워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원자를 들여다볼 수 있다면 상당히 이상한 점을 발견할 거예요. 바로 원자 속에 든 게 거의 없다는 점이지요. 사실 원자는 거의 텅 비어 있어요.
원자의 중심에는 핵이라고 부르는 아주 작은 점 같은 물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아주 작은 물질들이 마치 태양 주변을 도는 혹성들처럼 핵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데 그것들을 전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핵과 전자 사이에는 빈 공간이 아주 많습니다. 이 말은 원자로 이루어진 여러분과 나는 사실 대부분 빈 공간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원자 안의 빈 공간이 하도 커서 이 세상 사람들 모두의 몸에서 그 빈 공간을 다 빼 버리면 그 나머지는 각설탕 하나 정도에 담을 수 있어요. 상상해 보세요. 인류 전체를 각설탕 하나로 줄이다니. 아마도 무지무지하게 무거운 각설탕이 되겠지만요!
한 가지 더. 원자는 92가지 다른 종류가 있습니다.(거기에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과학자들이 만들어 낸 몇 가지가 더 있지요.)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레고 블록을 써서 집도 만들고 개나 배도 만들 수 있듯이 원자도 여러 가지 다른 종류를 섞으면 장미가 되기도 하고, 나무가 되기도 하고, 갓난아이가 되기도 하지요. 우리 모두는 여러 종류의 원자가 모여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이유는 우리를 만드는 원자의 조합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오른쪽 그림은 원자를 설명한 이 책의 삽화)
# 4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설명을 다 읽었으니까 이제 되었나?
충분히 이해가 되고 더구나 실감이 난다고 대답해야 하나?
나는 바보인가? 이렇게 친절한 설명을 읽었는데도 원자란 것에 대해 점점 더 오리무중인 상태가 되었다.
왜 원자(원자 가설)가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야 할 지식이라는 걸까?
정신을 차려서 문제를 새로 읽어보듯 저 앞에서 리처드 파인만 이야기를 꺼낸 책 《우아한 우주》에서 더 찾아봤다.
'게놈'이란 완전한 DNA 한 세트를 의미한다. 당신의 게놈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당신을 만들어내고 다듬는 데 필요한 매뉴얼이 모두 들어 있다. DNA를 구성하는 모든 분자는 각각 염기쌍으로 구성된 두 개의 가닥으로 꼬여 있는데, 마치 다른 사람과 함께 춤을 추지만 서로 그다지 가까이 붙어 있고 싶지 않아서 어색한 춤사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게놈은 약 30억 개의 염기쌍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중 0.1퍼센트의 차이만으로 서로 다른 사람이 된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이 사소한 차이로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인류의 다양성을 다 설명할 수 있다.
잘 아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원자가 신기하게 다가올까? '과연! 원자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야 할 지식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얘기야!'
나는 그렇지 못하다. 이 예시가 더욱 곤혹스럽게 한다.
돌아가는 수밖에 없겠지?
# 5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하자니까 문득 까뮈의 철학 에세이《시지프의 신화》가 생각났다.
'거기에 원자 얘기가 있었지?'
여기 나무들이 있어 나는 그 울퉁불퉁한 외양을 알고 있고, 물이 있어 나는 그 맛을 느낀다. 이 풀들의 향내, 밤의 별들, 마음이 느긋해지는 어떤 저녁들...... 그 힘과 강함을 내가 느끼고 있는 이러한 세계를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의 그 모든 지식은 내게 이 세계가 내것이라고 확신시킬 만한 어떤 것도 주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내게 이 세계를 묘사하고 이 세계를 분류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당신은 이 세계의 법칙들을 열거하고, 지식에 목이 마른 나는 그것들이 진리임을 인정한다. 당신은 그 메커니즘을 분해하고, 나의 희망은 켜져 간다. 마지막 단계에서, 당신은 이 신비롭고 다채로운 빛깔의 우주가 원자로 환원될 수 있으며 원자 자체는 전자로 환원될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그 모든 게 기분 좋으며, 그래서 나는 당신이 계속하길 기다린다. 그런데 당신은 내게 전자들이 하나의 핵 주위로 이끌리는 보이지 않는 어떤 태양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신은 이 세계를 내게 이미지로써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시(詩)로 전락하고 말았음을 깨닫는다. 나는 결코 알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내가 분개할 틈이 있을까? 당신은 이미 이론들을 바꾸어 버렸다. 그래서 내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기로 했던 과학은 하나의 가설로 끝나고, 그 명료함은 비유 속으로 빠져들고, 그 불확실함은 하나의 예술 작품 속에서 해소된다. 내가 그러한 수많은 노력을 할 필요가 어디 있었던가? 이 언덕들의 부드러운 선(線)들, 이 괴로운 가슴에 닿는 저녁의 손길이 내게 더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준다. 나는 나의 처음의 시발점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과학을 통해 내가 현상들을 포착하고 그것들을 열거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임을 나는 깨닫는다. 이 세계 전체의 높낮이를 내 손가락으로 더듬어 갈 수 있다 할지라도 나는 더 이상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확실한 것이긴 하지만 내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어떤 묘사와, 내게 가르쳐 준다고 주장하지만 확실치 않은 가설들 중의 선택권을 내게 준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세계에 대해서도 이방인이며, 스스로 주장을 하자마자 곧 저절로 부정되는 사고(思考)로 무장했을 뿐이며, 내가 인식과 삶을 거부함으로써만 평온을 얻을 수 있는 이러한 조건, 극복의 욕구가 그 공격에도 끄떡치 않는 벽들에 부딪치고야 마는 이러한 조건이란 대체 무엇인가? 의지를 작용시키는 것은 역설들을 야기시키는 것이 된다. 모든 것이 무념(無念), 무심(無心) 혹은 죽음의 체념에 의해 만들어지는 저 중독된 평온을 낳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다.
# 6
그만두자. 원자는 다 사라진다 해도 살아 남아 다음 세대에 전해져야 할 지식이라고 하더라는 것만 생각하자.
그럼 까뮈는 원자에 대해 내가 느끼는 것과 같은 관점으로 이야기한 걸까?
그렇지도 않다. 그는 세상의 이러한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굴러내려 간 바위를 찾아 산을 내려가 다시, 다시, 또다시, 그리하여 지금도 그 바위를 산정(山頂)으로 밀어 올리고 있으므로 이 삶을 굳이 포기할 것까지는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나는 원자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대로 두어야 할 단어이다.
이 길도 엉뚱한 길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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