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의 과목별 노트는 공식적으론 사라진 것 같다. 지시에 따른 변화는 아닌 것 같고 교과서가 ‘활동형’으로 바뀌면서 생각이나 느낌, 조사, 토론 결과 등을 교과서에 바로 적게 해주었기 때문이지 싶다.
앨빈 토플러(『제3의 물결』)가 공장을 모델로 해서 운영되는 대중 교육에서는 표면상으론 초보적인 읽기와 쓰기, 수학을 중심으로 역사와 기타 과목들도 가르치긴 했지만, 그 배후에 숨겨진 ‘시간엄수와 복종, 기계적인 반복 작업에 익숙해지는 것’ 등 세 가지 덕목(德目)이 산업사회의 기반으로서 훨씬 더 중요한 교과과정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하고, 대부분의 산업주의 국가에선 ‘지금(1980년)’도 여전히 그 덕목들이 그대로 작용하고 있다고 한탄했던 지난 세기의 교육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때는 그랬다. 새 학년 새 교과서에 맞춰 공책을 준비하고 필기를 많이 해주면 잘 가르친다고 여겼고 그렇지 않으면 의아해했다. 공부란 판서를 잘 받아 적어서 달달 외는 것이었으니 당연한 생각이었고 시골 초등학교에선 아예 ‘전과’라는 참고서 내용을 칠판 가득 판서해주는 일도 있었다. 핵심의 암기가 진학시험 대비였으니 의구심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세월이 가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교과서와 참고서 몇 권으로 예습 복습을 하던 학생들이 지금은 학교 공부만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학생 수 감소로 쩔쩔 매는 대학이 수두룩한데도 학원 의존 경향은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고 대안으로(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논리로) 등장한 ‘수능방송’은 어느새 또 하나의 필수 과정이 되고 있다.
상황이 복잡해졌다는 건 입장이 복잡해졌다는 것이어서 입학전형에 관한 한 어떤 정책을 제시해도 대다수의 환영을 기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개선해봤자 결국 경쟁을 피할 순 없고 이미 잘 알려진 경쟁을 각오하고 있으니까 제발 건드리지나 말라!”고 하소연한다.
5지선다형 시험이 공정하다고 믿는 그 호소를 배경으로 “98점과 99점은 다르다!”고 한 최고위 공무원의 발언에 대해 어느 전문가도 “다르지 않다” 혹은 “그것으로 공정성을 따지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반박하지 않았다. 더구나 다수가 지지하는 교육정책을 제시한 대통령은 전혀 기억나지 않고, 교육의 본질을 꿰뚫었을 뿐 아니라 일그러지고 피폐해진 우리 교육의 실상과 대책을 갈파하던 어느 대통령이 지금도 그립긴 하지만 그의 주장도 그대로 수용된 사례는 없었다.
대통령이 업무보고 자리에서 ‘이제 과거와 같은 소위 강의식, 지식전달식 교과서는 퇴출되어야 하고 문제를 보여주고 함께 생각하고 답을 구하게 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경쟁력을 키우려면 교육의 다양성이 필요하며 교육이라는 서비스(용역)를 국가가 독점 사업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 몇몇 ‘교육전문가’들이 교과서는 20년 전에 그렇게 변했고, 한국은 과잉 경쟁 때문에 청소년 자살이 속출하는 나라로 유엔에까지 알려졌다는 등의 사실을 들어 ‘별나라에서 막 오신 분 같다’고 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발언은 옳다!” 혹은 “전문가들이 사실에 근거하여 적절한 지적을 했구나!” 하고 싶진 않고 한 가지 요청을 하고 싶다. 교과서가 변한 걸 알고 모르는 건 다른 문제다. 그렇게 변한 교과서로 지금 우리 학생들이 오순도순 협력하고 토론하며 행복하게 지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생들이 그토록 경쟁해야 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
교사들도 학생들도 경쟁보다는 협력이 소중하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건 확실하고 분명한 덕목이지만 무한 경쟁의 이 나라 대입 관문을 잘 통과해야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가져서 행복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현실적인 논리 앞에서는 너무 멀고 비현실적인 덕목일 수밖에 없다.
교육을 포함한 ‘3대 개혁’이 관심사가 되고 있고 마침 교육에 대해선 아직 그 안이 결정되진 않은 것 같다. 전문가들이 지엽적 혹은 구체적 사실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는 데 힘쓰기보다 지식전달식 교육, 경쟁교육을 지양할 그림을 보여주면 그 뜻(방향)만으로도 훨씬 행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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