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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정훈희 '안개'

by 답설재 2022. 11. 20.

 

 

안개의 도시였습니다.

가망 없다는 느낌인데도 다른 길은 없어서 학교나 다녔고, 더러는 아무도 몰래 안갯속으로 빠져들어가 낮에 함께 공부하던 이성을 만났습니다.

안개 때문에 누가 오고 누가 갔는지 파악할 수가 없었고 만나서 무얼 했는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소녀 정훈희의 '안개'가 저녁마다 거리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그 노래는 누가 어디서 누구와 만나 어떤 얘기를 하는지 샅샅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나는 가망 없다는 느낌만으로도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필이면 그 '안개'가 휩쓸고 지나가는 바로 그 거리를 끝없이 헤매고 있었습니다.

내게 다가온 사람들은 내가 가망 없어하는 모습을 보고 아무런 기대나 희망을 느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느낌으로 하나씩 하나씩 멀어져 가버렸고 그리움을 남겼습니다.

 

그러던 나는 이렇게 나이 들어가고 있는데 돌연 그 소녀 정훈희가 나타나더니 그 '안개'를 부르고 이야기도 했는데, 이야기를 다 들어봐도 그곳이 안개의 도시였다는 데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55년만에 그 소녀 정훈희가 나타나 '안개'를 이야기했는데...

내 가슴속에서 그 소녀 정훈희는 끊임없이 '안개'만 부르고 그럴 때마다 안개가 낀 그 도시를 생각했는데 마침내 나타나서는 그 '안개'가 아니라 다른 '안개'를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그 안개. 끝없는 안개......

섭섭한 나는, 나도 지금은 그때 그 안개 속의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다 잊고 그때 그 밤들의 안개 속으로 돌아갑니다.

 

            '안개' ☞ https://youtu.be/k5cbx1zTS0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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