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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정해진 칸에 예쁘게 색칠하기

by 답설재 2021. 10. 9.

 

 

 

예전엔 이런 학습지가 없었습니다.

등사기가 있긴 했지만 그건 거의 시험지 인쇄 전용이었고 '학습지'라는 게 나타난 건 복사기가 보급된 이후입니다.

그래서 그 예전에는 색칠하기, 숫자를 차례로 이어서 모양 찾기 같은 과제는 여름 겨울 방학책에나 들어 있었고 아이들은 그런 걸 단시간에 해치우고는 "아니, 오늘 공부는 벌써 끝장이 났잖아!" 하고 호기롭게 일어서는 행복을 누렸습니다.

 

이런 공부가 즐거운 건 이미 윤곽이 그려져 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어떤 색을 선택해도 좋은 자유를 누리며, 거의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생각하니까 '누워서 떡먹기' 같은 이런 것도 참 좋은 공부가 되는구나 싶습니다.

 

얼마나 삭막합니까?

마스크를 쓴 채 하루 일과를 치러야 한다는 건 얼마나 가혹한 일이겠습니까?

이런 과제를 내주시는 선생님들께 새삼 고마움을 느낍니다.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1946)이라는 책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미국인은 생활 전부를 끊임없이 도전해오는 세계에 맞게 조정한다. 그리고는 그 도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반면 일본인은 오히려 미리 계획되고 진로가 정해진 생활양식에서만 안정을 얻으며 예견하지 못한 일에는 심각한 위협을 느낀다."

 

일본인들만 그렇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죠. 아니,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렇지 않을까요?

백지 한 장을 주고 "네 마음대로 그려봐!" 하면 더 좋을 것 같아도 어떤 아이는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다며 한 시간 내내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습니다.

미국 아이들은 그런 과제를 더 좋아한다는 걸까요? 저렇게 색칠이나 하고 그런 것보다는 백지를 기대하고 앉아 있다는 걸까요? 글쎄요~

사고력, 문제해결력, 창의력이 발휘되기를 기대하는 교육이 보다 바람직한 것은 말할 것도 없긴 하지만.

 

교육이라는 건 그 무엇보다 어렵고, 어쨌든 다양한 활동을 요구하고, 때와 장소에 맞추어야 하고......

실로 어려운 사업이죠.

지도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아도, 또 엉뚱한 정책을 내놓고 적용해도 '그런가 보다' 하고 마는 게 교육이거든요.

 

저 학습지를 마련한 선생님은 정해진 윤곽에 색칠하기만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지막 빈 페이지에 가을엔 또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써보고 그림도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저 아이는 '사르륵 사르륵' 책장 넘기는 소리도 들린다고 쓰고 그림도 그려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