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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녹말에 요오드 용액을 떨어뜨리면?"

by 답설재 2021. 4. 10.

 

 

 

1971년 어느 날 과학('자연') 수업 시간... 어언 오십 년이 지났습니다.

녹말가루에 요오드 용액을 떨어뜨려보는 초간단 실험이었는데도 나는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실험 결과는 "보라색으로 변한다"이고 일제고사 문제지의 "(    )색으로 변한다"의 (    ) 안에 '보라'를 써넣으면 그만이라는 건 아이들도 이미 다 알고 있는데도 나는 굳이 실험을 강행하고 있었습니다.

강행? 나는 그 시골 학교에서 과학실 수업을 실시하는 유일한 교사였고 아이들도 그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사실에 대해 생색을 내기 일쑤였지만 주입식 수업이 교사나 학생이나 피차 더 편하다는 걸 아는 아이들은 '그까짓 걸 가지고 뭐...' 시큰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강행'이 맞긴 맞겠습니다.

 

밝혀두거니와 내가 지금 이 글에서 "아이들" "아이들" 하고 있지만 그 아이들은 이미 63세가 됐으니 내 '아이들'은 육십 고개를 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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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얀 녹말가루는 원망스러웠습니다. 결코 보라색으로 변하지 않았고 그저 거무튀튀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우물에 가서 샬레를 깨끗이 씻어 오라고, 아마도 녹말가루나 요오드 용액 두 가지 중 한 가지가 썩은 상태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릇이라도 깨끗이 해서 다시 시도해보자고 주장(진단)했습니다. 약품이 오래되어 썩었을지도 모른다는 건 실험 결과가 석연치 않을 때마다 내가 일쑤 써먹는 수법이었지만 아이들은 뭐 하나 속시원한 일 없는 답답한 수업 중 의외로 바깥바람을 쐴 수 있는 기회여서 우르르 달려 나갔다가 해찰을 좀 한 뒤 하나둘씩 돌아왔는데 녹말가루나 요오도 용액은 특별한 이상이 없는 것이어서 깨끗한 샬레를 사용한 실험 역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세 번 네 번 되풀이하자 무던한 그 아이들이 마침내 짜증을 내고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이제 그만하시고요! 시험지에 보라색으로 써야 하는지 검은색으로 써도 되는지 그것만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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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통사정을 했지만 쉬는 시간조차 확보할 수 없는 상황을 간파한 아이들은 내 입장을 감안해주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나 혼자 당황했고 쩔쩔맸고 교실의 분위기는 풍비박산이었습니다.

나는 마지못해(=굴욕적으로) 시험지에는 미안하지만 보라색으로 써달라고(=거짓말을 해달라고) 부탁하고 수업을 마쳤습니다.

 

요오드 용액의 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건 나중에 알았습니다.

얼마만큼? 어떻게? 그건 모릅니다. 우리 학교는 '수업지침서'를 구입해주는 학교가 아니었고, 주변의 선후배 교사 중 요오드 용액이나 녹말가루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진 이는 눈 닦고 봐도 없었습니다.

"이 사람아! 녹말에 요오도 용액을 떨어뜨리면 보라색으로 변한다는 건 삼척동자나 유치원생도 아는 사실 아닌가, 이 답답한 사람아! 그건 5분 동안만 가르치면 다 외워! 5분은 무슨, 2~3분이면 될 걸?"

굳이 내 눈으로 그 보라색을 보려면 에디슨처럼 아마도 수십 수백 번 시도해보면 요오드 용액을 어느 정도로 묽게 해야 녹말가루가 딱 보라색이 되는지 알 수 있게 되겠지만 그러기엔 나에게 맡겨진 업무가 너무 많고 저녁에는 술을 마시자는 동료들의 등쌀에 견딜 수가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다만 그 실험은 지금 생각해도 초간단 실험인 건 분명했고, 보라색을 보기 위한 녹말가루와 요오도 용액의 배합 비율이 1+2=3처럼 고지식한 조합이 아니라는 사실도 명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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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레에 얌전히 깔아놓은 녹말가루에 스포이드로 요오드 용액을 한두 방울 똑 똑 떨어뜨리는 순간 그 하얀 그 녹말가루가 '짜잔~" 하고, 순진해빠진 게다가 어리숙해서 콧물이라도 흘릴 정도였던 초등학교 교사가 기대했던 그대로 해맑은 아침 나팔꽃 잎이 보여주는 그 아름다운 보라색으로 변해 준다면야 세상사(世上事)는 참 간단명료하겠지만 세상 일은 어느 것 하나 그리 단조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간단할 것 같은 이 실험에서 그 녹말가루는 실험을 할 때마다 그러니까 요오도의 농도와 양에 따라 매번 다른 색을 보여주고, 따라서 실험을 하는 사람에 따라(요오드의 농도와 양은 엿장수 맘대로니까) 매번 다른 색을 보여줄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말하자면 그렇게 간단명료하지 않은 세상은 그만큼 다양하고 재미있고 살아볼 만한(탐구해 볼 만한) 곳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걸 몰랐습니다. 오로지 녹말가루+요오드 용액  보라색이라는 변화여야만 통하는 세상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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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변명을 하면 '녹말가루+요오드 용액 = 보라색'이라는 건 내가 발견한 공식이 아니어서 즉, 그 당시의 참고서(전과), 문제집 등에 모두 그렇게만 나와 있어서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미심쩍은 행위였습니다.

우리 교육의 정체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녹말가루+요오드 용액 = 보라색 이외의, 예를 들면 녹말가루+요오드 용액 = 검은색 같은 사고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아서 엉뚱한 발언으로도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수십, 수백, 수천, 수만 가지, 아니 실험을 하는 아이들 수만큼의 색깔로 나타날 수도 있는 그 실험을 "보라색!" 한 가지로 요약하고 꿰맞추어야 하는 교육이었습니다.

그러한 교육의 상징(심벌)이 바로 ○× 그리고 ①②③④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보라색에만 ○표, 나머지에는 모두 ×표를 해야 하고 ①②③④ 중에서 보라색의 번호만 골라야 하는 시험이 우리 교육의 대명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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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향일까요?

백 명이 모여도 단 한 가지 의견으로 몰아가는 것이 민주주의인양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자칫하면 민주주의란 보스가 생각하는 바에 따라 손을 들어주는 삶의 방법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옳은 생각 혹은 바른 생각이 아니면 틀린 생각일 뿐인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실제 생활은 그렇지 않은데 ①②③④ 뿐만 아니라 수십, 수백, 수천, 수만, 이럴 것 없이 사람 수만큼의 사고방식, 사람 수만큼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는데도 승리 아니면 실패라고 생각하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녹말가루에 요오도 용액을 떨어뜨리면 그 색이 변한다, 요오드의 농도에 따라 더러 보라색을 띠기도 한다. 그렇게 가르칠 수 있으면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블친 'Helen of Troy'의 글을 보면 로테르담 어느 도서관의 '아이들을 위한 에라스무스 의자' 뒤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더랍니다.*

"이견(불일치)은 해를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자주 득이 된다(Disagreement does no harm, in fact it often does good)."    

나는 교육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바뀌었습니까?

정말입니까?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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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Welcome to Wild Rose Country" 2021.4.9 「네덜란드 여행 43 : 로테르담 에라스무스 기념비와 동상/성 로렌스 교회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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