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화장법"으로 등장해서 문명을 날리는 소설가 아멜리 노통브는 2004년엔가 유소녀기의 화려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베고픔의 자서전"에서 유치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전미연 옮김, 열린책들, 2006, 37~38).
그녀는 일본에서 유치원(요치엔)을 다녔다. 그 일본을 엄청 따스하고 아름다운 나라로 묘사하면서도 유치원에 대해서만은 앙갚음을 하듯 두들겨주었다.
겉보기에는 다 앙증맞아 보이는데, 속은 비열했다. 나는 첫날부터 요치엔을 향해 끝도 없이 혐오감을 느꼈다. 민들레반은 육군 훈련소였다. 전쟁을 하라면, 좋다. 하지만 호각 소리에 맞춰 무릎을 뻣뻣이 펴고 걸으면서 여선생으로 변장한 하사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복종하는 것, 이건 내 존엄성에 상처를 내는 일이었고, 다른 아이들의 존엄성에도 분명히 상처를 입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유치원에서 나만 유일하게 일본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동급생들이라고 해서 유치원의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라고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더군다나 특정 민족이라고 해서 노예근성이 배어 있을 것으로 지레짐작하는 것은 아주 천박한 상상일 테니까 말이다.
사실 나는 다른 아이들도 나와 똑같이 느꼈을 것이라고, 우리 모두 쇼를 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사진들이 이런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사진 속의 나는 친구들과 함께 웃고 있고, 바느질 시간에 얌전하게 바느질을 하고 있다. 일부러 건성건성 해치우는 중이던 내 작품 위로 눈을 내리깔고 있다. 하지만 나는 민들레반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너무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나는 끊임없이 분개하고, 분노했으며, 동시에 겁에 질려 있었다. 여교사들이 온화한 성품의 내 보모 니쇼상과는 너무나도 반대인 사람들이어서, 나는 그들을 증오했다. 곱살한 교사들의 얼굴이 또 다른 배신처럼 느껴졌다.
유치원은 좀 맞아도 좋은가?
모르겠다.
작가들 중에는 그냥 지나가도 좋을 대목인데도 슬며서 학교나 교사를 잡아다 놓고 조롱하고 비판·비난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도 유치원측에서는 말이 없다.
왜 항의를 하지 않나?
그들이 어릴 때 장차 작가가 될 재목인 줄 모르고 잘못 가르쳐서 좀 맞아도 좋다는 걸까? 어쩔 수 없다는 걸까?
유치원 선생님은 아이가 '실수'를 하면 얼른 옷을 갈아입혀주고 괜찮다고, 다 그런 거라고 오히려 격려해준다.
공립유치원 선생님이어서 그런가?
그럴 리 없다. 공립유치원 아이들이 점심 먹고 바로 하교하는 걸 보고 엄청 안타까워하는 아주머니를 봤다.
그녀는 사립에서는 오후 내내 가르쳐준다고 했다.
그럼 거기는 더 아름답고 아늑한 곳일까?
어쨌든 사람들은 왜 유치원을 비방 비난할까?
유치원과 학교는 세상의 마지막 낙원이 아닐까?
다들 그걸 모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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