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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앨리스 먼로 《행복한 그림자의 춤》

by 답설재 2021. 9. 2.

앨리스 먼로 소설 《행복한 그림자의 춤》

곽명단 옮김, 뿔 2010

 

 

 

 

 

 

편하다. 읽으면서 내가 구태여 그 흐름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런 느낌이다.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는 시골 구석구석을 누비는 외판원 아버지지 이야기다. 감기약, 철분 영영제, 티눈 약, 변비약, 부인병에 좋은 알약, 구강 청결제, 샴푸, 로션제와 연고, 레몬과 오렌지와 라즈베리 따위의 음료용 농축액, 바닐라 향료, 식용 색소, 홍차와 녹차, 생강, 정향유 따위의 양념들, 그리고 쥐약 같은 것들을 판다.

아버지는 이런 노래를 지어서 부른다.

 

티눈 약부터 부스럼 약까지

연고라면 갖가지 다 있습니다......

 

그 아버지가 어느 날 딸을 데리고 트럭에 올랐는데 장사는 되지 않았고 돌아오는 길에 예전에 한 동네에 살았던 여인의 집을 방문한다.

 

"벤, 나와 춤춰."

"내가 천하의 몸치라는 건 노라도 잘 알잖아."

"정말이지 난 그렇게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부터라도 알아둬."

아버지 앞에 서서 앞으로 뻗어 살짝 늘어뜨린 아줌마의 두 팔은 덩싯거리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함과 풍만함으로 나를 당황스럽게 했던 젖가슴은 헐거운 꽃무늬 드레스 안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나에게 춤을 가르치면서 달아오른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은 새로운 기쁨까지 더하여 환히 빛난다.

"벤."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고 담담하게 대답한다.

"난 됐어, 노라."

아줌마는 하릴없이 축음기로 가서 음반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술은 혼자 마셔도 춤은 혼자 못 추지. 춤 못 춰서 몸살이 났다면야 모를까."

"노라, 무슨 몸살씩이나." 아버지는 어물쩍 웃는다.

"있다가 저녁 먹고 가."

"아니, 아니야. 그런 폐까지 끼칠 순 없지."

"폐라니. 오히려 내가 고마운데."

"애들 엄마도 걱정할 거고. 도랑에라도 쳐박혔나 속 끓일 거야."

(......)

 

그런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살아가면서도 결코 기죽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집으로 가는 길에 아버지는 시골 어느 구멍가게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이나 탄산음료 대신 우리가 함께 나눠 먹을, 감초 사탕 한 봉지를 사온다. 나는 저 여잔 헛다리를 짚은 거야라고 생각하다가 그 말이 전에 없이 못되고 비꼬인 말 같아서 슬퍼진다. 집에 가서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고 입단속을 시키지 않는데도 아버지가 감초 사탕을 건네며 머뭇머뭇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다, 해서는 안 될 말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위스키 얘기와 어쩌면 춤 얘기도. 동생은 알아챈 것이 별로 없으니 걱정 없다. 끽해야 맹인 할머니, 마리아 그림이나 기억할 테니까.

"노래 불러요."

동생이 아주 명령하듯 말하자 아버지가 심각하게 대답한다.

"글쎄다, 노래 밑천이 바닥난 것 같구나. 넌 길을 잘 살펴보다가 토끼를 보거든 알려 주려무나."

그리하여 아버지는 운전을 하고 남동생은 토끼가 지나가나 길을 살피고 나는 우리가 차에 타고 있던 아까 그 오후의 마지막 순간부터 거꾸로 흐르면서, 어리둥절하고 낯설게 변한, 아버지의 삶을 더듬는다. 마치 마술을 부리는 풍경처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는 친근하고 평범하고 익숙하다가도 돌아서면 어느새 날씨는 변화무쌍하고 거리는 가늠하기 어려운, 끝끝내 알 길 없이 바뀌어버리는 풍경 같은 그 삶을.

터퍼타운에 가까워지지, 그 호숫가의 여름날 저녁나절이면 거의 예외 없이 언제나 그렇듯이, 하늘에 구름이 살짝 끼어 있다.

 

다른 소설(「하룻강아지 치유법」)에서 보는 실연의 시간은 이런 것이다. 누가 그렇지 않았겠는가.

 

나는 마틴을 만날 법한 곳들을 어슬렁거리고서 막상 마주치기라도 하면 못 본 척하기도 했고, 이야기를 할 때도 무심결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쓸쓸한 기쁨을 맛보려고 터무니없이 이야기를 그쪽으로 몰고 가기도 했다. 또 끊임없이 공상에 잠기기도 했는데, 사실 그 시간을 수치로 따져본다면 마틴 콜링우드를 생각하면서--그렇다, 그를 그리워하고 찔찔거리면서--보낸 시간이 실제로 그와 함께한 시간보다 모르긴 해도 열 배는 더 많았다. 마틴 생각은 내 마음을 손아귀에 넣고 제멋대로 주물렀고, 얼마쯤 지나서는 급기야 내 의지마저 거역했다. 만일 처음에 울며불며 야단스럽게 감정을 다 토해 냈더라면, 아마도 그때쯤에는 가뿐하게 훌훌 털어냈을 것이다. 그런데 궁상을 떨며 질질 끌다 보니 우울해졌고 한시도 편안하지 않았다. 수학 문제를 풀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쑥, 마틴이 혀를 깊숙이 들이밀어 키스하던 기억이 낱낱이 떠올라 꼼짝없이 고문을 당해야 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정확하게 되살아나는 그 기억이라니. 어느 날 밤 나는 충동으로 욕실 수납장에 있는 아스피린을 모조리 집어삼키려다 여섯 알에서 멈췄다.

 

열다섯 편의 소설, 캐나다 온타리오 주 휴런 호 인근 지역의 이야기들인데도 친근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