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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19층 B 소방관님께

by 답설재 2021. 6. 12.

소방관님이 생각나게 한 불빛 : '어떤 생각으로 바라보실까?...'

 

 

 

B 소방관님!

오늘은 출근을 하셨나요?

현장 출동을 하는 날이나 그렇지 않고 대기만 하다가 돌아오는 날이나 그 스트레스가 오죽하겠습니까!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정말 모르는 사람이라면 바보도 그런 바보가 없겠지요.

 

좀 많이 쉬셔야 하는데, 집에 계시는 날에도 두 아들을 위해 뭔가 하시는 것 같고 항상 피곤한 듯해서 안타까운 마음 가득합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소방관님 얘기를 듣기보다 제 얘기를 많이 하는 건 함께하는 그 시간이 제 마음보다는 너무 짧아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도 다 못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술을 좋아하시는지, 피곤해서 어쩔 수 없이 더러 한두 잔 마시는지, 그것도 알고 싶지만 노인이 젊은 사람에게 그런 걸 묻는 건 실례일 것 같아서 차마 물어보기가 어려웠습니다. 부디 많이 드시진 마세요~

두 아드님은 전보다 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만난 지가 그럭저럭 4년째인가요? 전에는 동생은 좀 천진난만한 태도를 보여도 형은 늘 초조해하는 것 같고 잠시도 동생 곁을 비우지 않고 그만큼 표정은 밝지가 않았거든요. 그러면서도 항상 동생을 잘 보살펴서 아마 세 살 어린 그 동생을 종일 보살피는 일에 지쳤는가 싶었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더러 만나는 소방관님 부인도 정숙하고 예쁘고 분명한 분 같아서 유치원 선생님으로는 100점일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아이들을 데리고 소방서 견학을 온 그 선생님께 소방관님이 홀딱 빠지셨겠지 싶었는데 제 짐작이 맞는 거지요? 제가 교육부에서 한때 유치원 교육과정도 담당해 본 경험으로, 공사립을 막론하고 유치원 선생님들은 초중등교원보다 일을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고, 유아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하시니까 주변으로부터 간섭도 직접적이고 심하고 까다로운 데다가 아이들을 부모와 똑같은 마음올 대해야 하므로 그 스트레스가 오죽할까, 만날 때마다 그 생각을 했습니다.

 

B 소방관님!

스트레스에 지지 않으시기를 바랄게요.

그 어떤 직장이 스트레스가 없겠습니까?

어쩌면 삶이란 게 다 그런 것 아닌가 싶기도 해요. 저 같은 사람은 공직에서 물러난지 10년이 훨씬 넘었는데 아직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네요. 코로나 19 백신을 맞았거든요. 누워 있다가 일어나 앉으니까 뭔가 초조한 느낌이고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뭘 해야 하는 거지?' 싶은 느낌이거든요. 이걸 트라우마라고 해도 좋을까요?

오늘은 학교 동기인 친구가 전화로 재미있는 얘기를 해서 '아, 맘놓고 지내도 되는 건가?' 싶었다니까요.

 

B 소방관님!

건강과 행운을 빌어드릴게요.

소방관님의 가족 모두 잘 지내기를 기원할게요.

힘내셔야 해요~

 

 

추신 : 잊을 뻔했습니다. 아모스 오즈의 소설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1》에 소방관이 되고 싶었다는 얘기가 있어서 그걸 읽으며 소방관님께 편지를 써야지 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철저하고도 오래도록 세뇌된 희생양이었다. 탈피옷에 있는 요셉 큰할아버지의 사원을 이루었던 책들, 케렘 아브라함의 우리 공동주택에 있는 아버지의 구속복이었던 책들, 어머니의 피난처인 책들, 알렉산더 할아버지의 시편들, 우리 이웃이었던 자르키 씨의 소설들, 아버지의 색인 카드와 단어 게임, 심지어 사울 체르니콥스키의 냄새나는 포옹과 돌연 몇 개의 그림자를 드리우던 아그논 씨의 건포도로.

그러나 사실 나는 내 방 문에 핀으로 못박아둔 명판에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수년 동안 나는 책으로 된 이 토끼굴로부터  탈출해서 자랄 수 있기를, 그리고 소방관이 되기를 꿈꾸었다. 불과 물, 소방관 제복, 영웅주의와 빛나는 은빛 헬멧, 사이렌 소리, 소녀들의 응시와 번쩍이는 불빛과 거리에 가득찬 공포, 지나간 자리에 공포가 남겨지는, 빨간 소방차의 뇌성 같은 임무.

그다음엔 사다리들, 끝없이 펼쳐지는 호스들, 소방차의 빨간색에 솟구치는 피처럼 비치는 작열하는 화염, 그리고 마침내, 클라이맥스, 정신을 잃고 용감한 구조자의 어깨에 실려 나오는 소녀나 여자, 불에 그을린 피부와 속눈썹, 머리카락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자기희생적인 헌신, 질식할 듯한 지옥의 연기, 이후엔 곧바로―찬양, 어지럼증 속에 감사와 숭배에 잠겨 당신을 보며 혼절하는 여자의 눈물겨운 사랑의 강물, 그리고 그들 가운데 그 무엇보다 가장 대단한 것은, 자기 팔의 부드러운 힘으로 여자를 화염에서 용감하게 건져낸 그 사람.(《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1》503~504)

 

 

소방관이든 경찰관이든 또 뭐든 어릴 때 저런 공명심이 전혀 없어도 '세상에 뭐 저런 아이가 있나?' 싶을 수가 있겠지만 그 천진난만하던 때의 꿈을 버리지 않고 끝내 소방관이 되어 평생 위기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소방관님 같은 분도 '세상에 뭐 저런 이가 있나?' 하고 바라볼 만한 분이거든요. 어쩌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 덕분에 좀 여유로운 건 분명하니까 고맙고 또 고맙지요.

B 소방관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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