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나는 허당이겠지요?

by 답설재 2021. 5. 8.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왜 사는가?'

생각합니다.

 

현직에 있을 땐 건방진 생각일지언정 신념, 자부심, 의무감, 책무성... 같은 단어를 곧잘 동원할 수 있을 만큼 힘차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여기에 이른 것인데 이제 내가 지금 왜 사는가 싶을 지경이 된 것입니다.

 

아무도 내게 일에 대해 묻지 않습니다. 내 지식은 쓰레기가 된 것입니다.

그 '일' 말고는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릅니다.

가만있어 보세요... 운전을 해서 시장을 봐 올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매번 아내의 잔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요. 잔소리를 하는 쪽도 그렇고 듣는 쪽도 그렇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으면 당장 그 방법을 따를 것입니다.

 

그 외에는? 쑥스럽긴 하지만 청소가 있습니다. 내가 청소를 할 줄 안다고 하면 아내는 웃지도 않을 것입니다. 기가 막힌다 싶으면 "이게 지금 청소를 한 거냐?"고 묻긴 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요리도 있지 않느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건 내가 이 세상에서 전혀 할 줄 모르는 일 중의 한 가지입니다. 어쩌다가 혼자 있게 되면 나는 라면으로 때를 잇고, 그 라면 맛은 매번 다릅니다. 아내가 조치를 해놓지 않으면 '잘됐다' 하고 얼른 빵을 사다 놓기도 합니다. 그 외에는 이야기할 게 없습니다. 냉장고에 있는 건 아내가 있을 땐 생각나는 것도 아내가 없으면 생각나지 않습니다.

 

이제 내가 가진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사람들은 이제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면 '그럼 가진 것이 있겠지' 생각할 테니까요.

나는 돈은 없습니다. 조금 모은 걸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한 달 한 달 연금을 받아 생활하는데 전임 대통령 때 5년간 연금 인상이 정지되는 한편 물가는 계속 상승해서 그 연금으로 생활한다는 게 현직에서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열악한 수준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현직에 있을 때는 연금으로 생활할 노후가 보랏빛 꿈이기도 했는데 지금은 주부로서 헌신한 아내에게 쑥스럽고 미안한 입장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밥을 굶지나 않으면 괜찮은 일인데 아내에게 버젓하진 않습니다.

 

옷도 이야기하겠습니다. 아직 좀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남아 있는 게 문제입니다. 십여 년 간 단 한 번도 입은 적이 없었고 지금은 잠바나 뭐나 예전엔 천덕꾸러기 같았던 옷 몇 가지를 주로 입는데 그것들은 허접해서 막 입기에 만만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쩔 수 없이(혹은 마지막으로) 책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그건 나의 자부심이었습니다. 나의 재산이었고 정신이었고 나의 대변자였습니다.

그런 것들을 팔다리 절단하듯 몇십 권, 몇백 권씩 내다 버릴 때는 나쁜 짓을 하는 아이처럼 그렇게 했습니다. 누가 물을까봐 걱정스러웠습니다. "당신 이젠 미쳤어? 그걸 모으고 사고 할 때는 언제고 지금 왜 그래?"

그런데 기이하게도 나의 그 미친 행동에 관심을 보여주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가끔 남은 책들을 둘러보곤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큰일난다 싶은 책을 고르라면?

없습니다.

"어떤 책이 당신을 대변할 수 있나요?"

누가 그렇게 묻는다면? 글쎄, 그런 책도 없는 것 같습니다.

"평생 책을 읽었다는 사람이 어째 그 모양이에요? 나에게 추천할 만한 책은 있나요?"

그렇게 묻는다면, 그것도 난감한 주문입니다.

 

전에 내가 교장이었을 때 뉴질랜드로 유학을 떠난 아이가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코로나 때문에 잠시 귀국해 있다기에 책이나 좀 보내줄까 생각하고 서장을 둘러보았는데, 이런... 재미있고 따분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쓸모 있는 책은 당최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이 책들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걸 재산이라고 나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허당'입니까? 아무래도 나는 허당이겠지요?

 

 

 

'내가 만난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이미 유령입니다"  (0) 2021.05.14
인간 엄장의 길  (0) 2021.05.10
"라스티냐크, 끝까지 갈게! 몰락한 고리오라도 괜찮아..."  (0) 2021.05.06
뉴실버세대의 모습  (0) 2021.05.05
응원  (0) 2021.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