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지금은 아파트 앞 미장원(헤어샵?)을 기웃거리다가 손님이 없구나 싶으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슬쩍 들어가지만 전에는 굳이 이발소(말하자면 남성용 '헤어샵')를 찾았고 그것도 현직에 있을 때처럼 꼭 주말을 이용했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리 없어서 연중 '주말'인데도 그딴 일은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듯 굳이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차를 가지고 멀리 이웃 동네에 있는 이발소를 찾아가곤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며 퇴임한 지 네댓 해가 지난 어느 토요일 아침나절이었습니다.
이미 두어 명이 소파에서 주말판 신문을 보며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고 지금 머리를 깎고 있는 중년은 분명 K 교사였습니다. 들어서면서 거울 속에서 서로 눈이 마주쳤는데 나는 하마터면 인사를 할 뻔했습니다. 하마터면? 그 순간! 아니지, 당연히 저 사람이 내게 먼저 인사해야 마땅한데 어떻게 하는지 보자 싶었습니다. 함께 현직에 있으면 내가 먼저 인사해도 좋겠지만...... 물론 인사를 받게 된 그는 당황하고 미안해하고 그렇겠지만......
세상에...... 그는 스르르 눈을 내리깔았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유령인 걸 알아챈 것 같았습니다.
그걸 알아챈 나도 '유령'이고 '비유령'이고 간에 돈만 주면 '고객'으로 쳐주는 이발사와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간혹 면도사 겸 잡역부인 그의 부인과도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 2
유령이라도 어느 시점까지는 이승에서, 생존한(아직 '멀쩡한')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한다는 걸 나는 지금 잘 체험하고 있습니다.
아내로부터 시장을 좀 봐 오라는 부탁도 받곤 하는데 그날은 기이하게도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업체 측 말로는 무빙워크)에서 무심코 저쪽 에스컬레이터를 바라보다가 물건을 실은 카트를 잡고 올라가는 N 교사를 만났습니다.
N 교사는 유령을 보고도 K 교사처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똑바로 나를 바라보더니 그 참 이상하다는 듯, '죽은 사람이 어떻게 마트에 왔지? 이 마트는 죽은 사람도 이용하는 마트였던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올라가는 그와 내려가는 내가 서로 마주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서 그 해후(?)는 잠깐으로 끝나버렸습니다.
"나 지난 토요일에 ○마트에서 유령이 된 파란편지를 봤어! 아니 이 사람아, 정말이야! 허름한 점퍼를 입고 캡을 쓴 파란편지는 우리 학교 교장일 때보다는 훨씬 더 늙고 초췌해 보였고 눈에 정기도 거의 다 빠졌지만 그 모습은 영락없는 파란편지였다니까 그러네~"
그 월요일에 N 교사는 몇몇을 상대로 그렇게 열을 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 3
아내와 함께 로컬푸드 계산대에서 구입한 물건을 정리하다가 내가 그 학교 교장이었을 때 졸업한 어느 남매의 어머니 T를 만났습니다.
T 여사는 바로 옆 계산대에 서 있었는데 나(나의 유령)를 보더니 얼른 눈을 내렸고 표정이 묘하게 변했습니다.
그분은 그 학교에 부임한 나를 적극적으로 환영해주었고, 내가 그 학교에서 근무하는 동안 줄곧 친근하게 대해주었고, 학부모가 할 일에 적극 나섰고, 심지어 내가 퇴임한 후에도 두어 번 사람들을 모아 식사도 함께했습니다.
내가 그 로컬푸드에서 만난 그녀를 잊지 못하듯이 그녀는 그날 그곳에서 만난 유령을 잊지 못할 것 같아서 참 미안합니다.
하필이면 파란편지의 유령이라니, 이 몰골이 자꾸 떠오를 것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밥맛 떨어질 일이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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