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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아모스 오즈《첫사랑의 이름》

by 답설재 2021. 3. 30.

아모스 오즈 《첫사랑의 이름》

Soumchi: A Tale of Love and Adventure

정회성 옮김, 비룡소 2019

 

 

 

 

 

 

 

나는 맥이 쏙 빠졌다. 생각할수록 내 신세가 처량했다. 알도는 내 자전거를 가져갔을 뿐 아니라 계약서에 서명까지 하게 했다. 고엘은 멋진 전동 기차를 빼앗아갔다. 잘 길들여진 늑대는 내게서 도망쳤다. 녀석은 지금쯤 숲 속을 헤매고 다닐 것이다. 우리 집? 필요 없다. 나는 다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는 집의 흙먼지를 내 발에 묻히지 않을 것이다. 그 집에는 영원히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

에스티? 에스티는 나를 미워하고 있다. 비열한 알도 녀석은 연애시가 적힌 내 수첩을 훔쳐서 깡패 같은 고엘에게 팔아넘겼다.(89)

 

'숌히'(닉네임)의 처지는 이처럼 딱하지만 그는 겨우 열한 살이다. 부모, 교사, 친구들, 첫사랑 등 다들 그를 미워한다.

어느 날 첫사랑이 예고 없이 찾아왔던 것처럼 어느 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우리 동네 사갸라 거리에는 에스티라는 여자애가 살았다. 나는 그 애를 사랑했다. 매일아침 식탁 앞에 앉아 빵을 먹을 때마다 나는 조그맣게 그 애 이름을 불러 보곤 했다.

"에스티......"

하루는 내가 그 애 이름을 중얼거리자 아버지가 말했다.

"음식을 먹을 때는 입을 다물어라."

그날 저녁이었던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두고 이렇게 투덜거렸다.

"저 정신 나간 녀석이 또 욕실 문을 걸어 잠그고 물장난을 하는군."

"그러게 말예요."

그러나 나는 결코 물장난을 한 게 아니었다. 단지 세면대에 물을 가득 받아 놓고 손가락으로 수면 위에 에스티의 이름을 적어 보았을 뿐이었다.

 

첫사랑도 이루어진다.

사실은 '숌히'를 특별히 미워하는 사람은 없다.

아버지 어머니가 미워서 히말라야의 눈 덮인 산봉우리를 바라본 다음, 아라비아 사막을 건너 통곡의 벽을 지나서 밀림을 뚫고 잠베지 강 수원지로 떠나 자유로운 야생의 삶을 살리라고 다짐했지만 정작 거리를 방황한 그날 자정, 아버지는 천신만고 끝에 "우리 집 보배"를 찾는다.

   

그러나 프롤로그에서 "모든 것은 변한다"고 한 것처럼 에필로그에서는 첫사랑이 이루어진지 한 달 반쯤 '여름이 끝날 무렵 모든 게 변했다고 했다'. '변하지 않은 채 똑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그 무렵 내게는 새로운 일이 생겼다. 어떤 일이냐고? 그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겠다.

 

그렇지? 거의 누구에게나 새로운 일이 생기고 첫사랑은 사라진다.

 

작가들은 성장기의 일들을 소재로 한 소설을 남기고 싶어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