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 예찬》

by 답설재 2021. 3. 25.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걷기 예찬》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 2010(초판 16쇄)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보던 고급 에세이의 이 분위기는 마지막까지 거의 변함없다.

재미있는 일화도 몇 편 들어 있고 자주 장자크 루소, 피에르 상소, 패트릭 리 퍼모, 바쇼, 스티븐슨의 문장이 등장한다.

 

걷기가 죽음을 유보시켜 준다는 걸 강조하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이 블로그에 와서도 몇 번이나 "(죽지 않으려면) 걸어라!"고 직접적으로 강요했다. 심지어 걷기 같은 건 아무 상관도 없는 포스팅의 댓글에서도 "걸어라!"고 썼다. 자신은 걷기의 전령사여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행세했다. 역겨웠고, 차라리 아예 문밖에도 나가지 않고 있다가 죽어 비리면서 "나는 당신의 훈화를 거절했다!"고 외치고 싶게 했다.

걷기의 전령사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이 책을 보여주고 싶다. 책까지 읽기는 싫다고 할까? 그렇다면 이 문장이라도 보라고 하겠다.

 

히말라야산맥 속에서의 느린 걸음은 서로 다른 식물군과 기후의 층계참들을 거쳐 구름에서 구름으로 기어오르는 길이었다. 티베트로 가는 고갯마루의 가장 높은 곳에 이르자 고빈다는 전통에 따라 돌탑의 주위를 여러 번 돈다. 이곳에 이른 저마다의 순례자가 아무 탈 없이 도착하게 된 것을 산에 감사드리기 위하여 돌 하나씩을 얹어 쌓은 탑이다. 그도 자신의 불굴의 각오를 다지고 또 같은 길을 걸어온 다른 모든 순례자들에게 인사를 보내기 위하여 자신의 돌 하나를 더 보탠다. 이때 그는 아직 떠도는 승려 시절의 불타가 하신 말씀을 생각한다. '나는 고독하게 수 천리 흰 구름의 길을 가노라.'

 

걷기 예찬!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문장을 보았다.

 

... 걷는 것은 죽음, 향수, 슬픔과 그리 멀지 않다. 한 그루 나무, 집 한 채, 어떤 강이나 개울, 때로는 오솔길 모퉁이에서 마주친 어느 늙어버린 얼굴로 인하여 걸음은 잠들어 있던 시간을 깨워 일으킨다. '길을 나타내는 선은 단순히 물질적 질서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 표지들을 갖추고 있는 법이다. 그 표지들이 없다면 길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우리가 계속 걸어갈 수 있는 것은 그냥 길이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감정이 메마른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을 수많은 개인적 추억들, 혹은 유형학적이고 감정적인 친근감 같은 것들이 길을 만든다.'*

 

 

 

..............................................

* 피에르 상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