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 정채봉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으로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어디가 아플 때, 가령 가슴이 아플 때, 가슴속의 내 핏줄이 흥분으로 아우성을 칠 때, 머리가 아프고 이명이 심해져서 완전 벌집을 쑤셔 놓은 것 같을 때, 수십 년이 지났는데 문득 억울할 때, 외로울 때,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울 때, 서러울 때, 이러지 말고 그만 돌아가고 싶을 때, 아무래도 신이 나지 않을 때......
위안을 삼았습니다.
그런 정서는 나의 삶의 주제처럼 되었고, 시는 마취제처럼 '살며시' '스르르' 가라앉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아니 그런 느낌을 실제로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고 어릴 때 하얀 진물이 배어 나오는 양귀비 잎사귀를 보리밥에 비벼 먹었을 때처럼 그런 아픔을 잊은 채 다시 책을 펴거나 건전지를 갈아 끼운 로봇처럼 '내가 지금 뭘 해야 하지?' 하고 일어서곤 한 것이었습니다.
이 시를 소개한 김태훈 기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아동문학가 정채봉(1946~2001)의 기억에는 어머니가 없습니다.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으니까요. 아기였을 때는 응석 한번 부리지 못했고, 청소년기에는 힘들거나 좌절했을 때 어머니의 따뜻한 위로 한번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아쉽다 못해 억울했을 것 같습니다.
(후략)
이 시를 소개한 기자의 해설을 따라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고 그러면서 내 감정을 다스리는 길 하나를 마련하고 싶었고, 그런 마음을 가지는 순간 나는 다시 어른스러워지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12월 어느 날, 이 집 거실 창 너머로 들어온 포근한 겨울산을 내다보면서 나의 어머니를 떠올렸습니다.
겨울산 ☞ blog.daum.net/blueletter01/7640082#none
나는 저승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면 아마도 서러워서 울 것 같습니다.
우리가 헤어진 건 이제 오십 년이 다 되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마흔여덟이었습니다. 내 밑으로 일곱 남매를 더 낳은 어머니는 그 몸이 낡을 대로 낡았을 것인데 심장병은 나도 이렇게 지병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고 있지만 나보다 훨씬 더 형편없었던 그 몸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병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때 이미 그렇게 망가져서 할머니가 되어 있었지만 우리가 저승에서 서로 만났을 때 내가 나의 서러움 같은 걸 들어보라고 하기보다는 말없이 꼭 안아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고, 저 포근한 느낌의 겨울산을 보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니, 나는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웃으며 다가가서 "엄마" 하고 불러보고 그 작고 낡아빠진 몸을 내 가슴으로 안아줄 것입니다.
어머니는 나의 "엄마"이긴 하지만 내 쓸데없는 서러움 같은 걸 들어보거나 들어주기보다는 내가 꼭 안아주기를 바라는, 그렇게 해주는 것을 좋아하는 한 가냘픈 여성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안아주기 전에는 아무도 안아줄 이 없을 나의 어머니......
내가 안아주어야 마침내 마음 놓고 완전히 죽을 수 있을 나의 어머니.....
그래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나의 어머니......
내가 언제 오려나, 그것만 생각하고 있을 나의 어머니......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의 어머니......
.........................................................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조선일보 2015.9.3, [김태훈의 알콩달콩 詩] "네가 힘이 들 땐 '엄마!' 하고 부르렴"(인터넷 검색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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