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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끔찍한 기념 타월

by 답설재 2020. 9. 18.

마트에 진열된 수건들은 늘 눈길을 끈다. 몇 장씩 묶여 있는 그 수건 세트를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색상도 무늬도 아름다운 저 수건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

아내 몰래 사서 누가 주더라고 해볼까? 한동안 생각하다가 그 사기(詐欺)는 포기하고 말았다.

아내는 기념 타월을 차곡차곡 챙겨 자신은 아껴 쓰고, 아낌없이 나눠주면서 “지금까지 수건은 사서 쓴 적이 없다”고 하는 걸 몇 번 들었는데 좀 자랑스러운 느낌이 배어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아내와 나)의 삶이 신산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아내가 모아두고 쓰는 그 기념 타월이 우리의 곤궁함을 보여주는 상징은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돈으로 치면 몇 푼 하지 않을 그 기념 타월을 얻게 되면 집에까지 오는 동안 분실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써서 전철이나 어디 놓고 내린 한두 번 실수 외에는 꼭 챙겨 들어온 것은 다만 아내의 그 말이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념 타월이 정말 싫다!

끔찍하다!

언젠가 정갈한 것이 분명한 어느 여성이 기념 타월의 글자와 무늬는 인쇄잉크로 새긴 것이어서 위생에 좋지 않다며 자신은 그런 수건을 써본 적이 없다고 한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렇지만 내가 끔찍하게 생각하는 건 결코 그런 의미는 아니다.

아내는 수건과 속옷은 평생 ‘폭폭’ 삶아 내는데 거기에 인쇄잉크가 묻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불친 준서 할머님의 블로그(“봄비 온 뒤 풀빛처럼”)에서 새벽에 일어나 수건 다섯 장을 삶으며 썼다는 글(“타월 수건”)을 읽으며 나에게는 기념 타월에 끔찍함이 배어 있다는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끔찍하다는 말은 ⑴ ‘(사건이나 상황이) 참혹하거나 무섭거나 싫거나 하여 진저리가 날 정도이다’ ⑵ ‘(대상이) 양이나 수가 크거나 많거나 하여 몹시 놀라울 정도이다’ 혹은 ⑶ ‘(정성이나 성의 따위가) 매우 극진하다’는 뜻이라는데, 내가 기념 타월을 보며 느끼는 끔찍함은 ⑴의 경우다.

 

기념 타월은 그 타월을 나누어준 ‘취지에 맞추어’ 꼭 당시의 일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고 그러면 그 기억은 일쑤 이런저런 추억까지 데리고 온다. 단지 기억 혹은 기억과 추억을 소환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내가 근무하던 그 학교·기관이 조만간 어떤 일 때문에 한 번쯤은 정말로 나를 소환할 것 같은 느낌도 있다. 그동안 뭘 하며 지냈는지 묻거나 그때 벌여놓은 일을 마무리하라거나 혹은……

처음에 나는 내가 근무한 학교, 내가 근무한 기관, 그 어디서도 정말로 나를 부를 일은 없다는 걸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뭐가 아쉬워서 나 같은 사람을 부르겠는가. 아니 누가 나를 기억이나 하겠는가……) 그 당시의 일들에 대한 기억, 추억들을 즐겁게 회상하여 말없이, 조용히 걸려 있는 그 기념 타월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곤 했는데 그 기념 타월이 만들어진 이후의 10~20년 간 그런 회상도 한두 번이지 이젠 사전(事典)의 저 해석대로 넌더리가 나고 지긋지긋한 점이 없지 않게 된 것이다.

수건의 그 인쇄 내용과 날짜 같은 걸 보는 순간! 나는 어김없이, 어쩔 수 없이, 10~20년 전의 그 당시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니 말하자면 나는 어김없이 반복되는 사시사철, 눈만 뜨면 시작되고 거듭되는 나날들의 그 숱한 시간에 하루에도 몇 번씩 걸핏하면 지난 일들에 대한 기억 혹은 추억에 붙잡혀 숨 쉬게 되는 것이다.

 

“노인들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도 정말 듣기 싫고, 더구나 버트런드 러셀의 「지겨운 사람들에 관한 연구」라는 농담반 진담반인 에세이에 의하면 일곱 가지의 지겨운 인간 유형 중 여섯 번째가 ‘일화들을 들먹이며 지겹게 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들은 보통 추억에 잠긴 나이 지긋한 신사들로서 걸핏하면 "자네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 이런 일이 생각나는구먼."하고 시작한다는 글을 읽고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인간이 되지 않겠다! 지나가고 나면 다 그만이니까, 그리고 이제 결코 나의 세상은 아니니까, 그저 조용히 잊고 잊히는 것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며 지내자고 굳게 다짐하곤 해서 자의든 타의에 의해서든 옛 일들을 더듬는 나 자신에게조차 넌더리를 내고 있으므로 수건을 바라볼 때마다 자동 장치에 걸려버린 것처럼 기억과 추억 속으로 소환되고 마는 것이 어떻게 지겹지 않고 넌더리가 나지 않겠는가.

내가 겪은 그 일들은 물론 불편했던 적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 따듯한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 세월들이 행복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두고두고 떠올리고 음미해보아야 하는 시간을 정녕 노년기의 ‘새롭고 유익한 경험’이라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한마디로 끔찍하다!

 

나는 정말이지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물리적으로 옛날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므로 사고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저 수건들이 불러오는 기억, 추억 같은 걸 외면하고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

기념 타월은 나에게서 쉽게 물러날 존재가 아니어서 더욱 그렇다!

 

준서 할머니도 그 수건들을 삶아 빨면 까슬까슬(까실까실)해서 좋다고 했지만 아내도 빨래를 삶아 말리고 마른빨래를 정리할 때마다 그 얘기를 한다. 수건이란 오래 쓰면 보드라운 털은 다 빠져버리고 굵은 올이 남아 끝까지 버틸 것이어서 오래 쓸수록 더 까슬까슬해질 것은 당연한 일일 텐데 아내는 그 까슬까슬함을 빨래를 삶는 것에서만 연유한다고 여기니까 저 수건들을 심지어 구멍이 나도 잘 버려지지 않는다.

 

내가 과감한 결정을 내리고 아내 몰래 슬쩍슬쩍 낡은 수건들을 버려나간다 해도 이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다. 저 장롱 어딘가에는 갖가지 기억과 추억에 물든 잉크 냄새를 머금고 아직도 수십 장의 기념 타월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어서 거기까지 생각하면 나는 정말이지 암담하고 끔찍하다.

나는 이래저래 기억과 추억에 관한 한 ‘빈’(힘없는, 실없는)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저 기념 타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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