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왜 아플까?
단편소설 한 편을 읽으며 생각했었습니다. '내가 지금 죽으면 이렇게 죽는 것이겠구나......'
2010년 봄이었으니까 그럭저럭 12년이 되어갑니다.
그해 1월에 나는 심장병으로 병원에 실려갔다 돌아와서 이젠 웬만하면 그렇게 지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를 파먹으려고 덤벼드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제 이야기지만 사람의 일입니다.
결국 그해 9월 나는 다시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그 병원으로 실려갔습니다.
생각도 하기 싫은 기억입니다.
나를, 내 심장을 파먹으려드는 그 일이 그해 4월호 『현대문학』(98~125)을 읽으며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연규상 「다리, 너머」)
연규상 작가는 1966년 충북 음성 출생으로 충북대 영문과 졸업하고 201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라고 했습니다.
나는 내 죽음의 증거를 설명할 수 있는 그 소설에서 세 부분을 정신없이 옮기고 있었습니다.
톰슨가젤 한 마리가 이상하다. 자유롭게 풀을 뜯는 다른 동료와 달리 놈의 몸이 자꾸 왼쪽으로 기운다. 기울어지면 바로 서고 바로 서자마자 기울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틀비틀 원을 그리면서 돈다. 동료들은 풀을 뜯다 자신에게 부딪치는 놈을 힐끗거리지만 그뿐이다. 새끼인지 작은 놈이 어미 뒤를 몇 번 따라 돌다 그만 멈추어 선다. 초점을 잃어가는 까만 눈동자는 어지럼증 때문이라기보다는 두려움과 절망 때문에 아득하다. 동료 무리가 다른 초지로 옮겨 가자 새끼와 둘만 남게 된 놈의 동선은 훨씬 도드라진다. 왼쪽 앞발의 마비에 갑작스레 몸이 기울어지면 쓰러지지 않기 위해 얼른 오른쪽 앞발을 내디뎠다. 숨이 차는지 턱밑으로 침이 흐른다. 호흡이 거칠게 끊어진다. 서서히 원경으로 빠져나온 앵글 속에서 새끼가 광막한 초원을 바라본다. 고요하다.
…(중략)…
톰슨가젤이 궁금해 되돌아간 내셔널지오그래픽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직도 놈이 돌고 있다. 기력이 달린 탓에 속도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놈은 2미터 안팎의 작은 괘도를 미친 듯 운행하고 있다. 새끼는 보이지 않는다. 냉랭한 어투의 내레이션이 궁금증을 풀어준다. 모든 게 한 마리 파리 때문이었다. 우연히 길을 잘못 든 파리는 톰슨가젤의 귓속에 갇히고 잔 솜털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한 채 고막 근처에 수백 개의 알을 낳고 죽는다. 부화한 유충은 썩은 어미의 사체를 먹으며 자라다 고막의 미세혈관을 통해 톰슨가젤의 뇌로 침투한다. 이 작고 조용한 게릴라들은 뇌에 염증을 일으키며 균형중추와 운동신경계를 교란한다. 일종의 세균성 뇌병변 증세를 보이는 톰슨가젤은 자신의 뇌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왜 돌아야 하는지 모른 채 기력이 다할 때까지 돌게 될 것이다. 노란 창문 모양의 내셔널지오그래픽 마크를 깡총 뛰어넘어 지평선 뒤로 사라질 것만 같았던 톰슨가젤의 회전은 멈추지 않는다. 적외선 카메라에 번득이는 눈엔 이제 처연한 체념의 빛이 깃든다.
…(중략)…
그사이 내셔널지오그래픽엔 다시 세렝게티의 새벽이 밝아온다. 화면상단의 디지털시계는 72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꼬박 사흘이 지나도록 다행히 톰슨가젤은 맹수의 습격을 받지 않았다. 운이 좋은 것이다. 더 다행인 건 그 지긋지긋한 회전을 멈춘 것이다. 달콤한 휴식이 톰슨가젤의 가지런하고 고요한 호흡에 머문다. 콧구멍 속으로 한 무더기 모래가 천천히 들락거린다. 짓무른 포도알처럼 탁한 눈은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반쯤 감겨 있고 수많은 파리들이 몸을 뒤덮고 있다. 동료의 실수가 빚어낸 죽음에 죄의식을 느낀 파리들은 부족 전체가 날아와 임종을 지켰고 숨이 멎자 하이에나와 마샬이글과 구더기들이 며칠 동안 눌러앉아 조문했다. 왁자한 의사당이 한산해지고, 헐떡이던 침실이 몽롱해지고, 야생의 장례식이 끝난 초원마저 다시 적막해지자 세상은 비로소 긴 침묵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