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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논단

선생님의 전화번호(2019.6.6)

by 답설재 2019. 6. 6.

 

 

 

 

전국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교사 대부분(96%)이 학부모들에게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공개하고 있다(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2018.6). 그중 64%는 근무시간 구분 없이 말하자면 시도 때도 없이 이런저런 전화를 받아야 했고 그로 인한 교권침해가 심각하다고 했다.

 

전화번호를 공개하지 않은 교사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아예 "이게 내 전화번호요." 하진 않지만 불가피한 사정이 있는 학부모에게만 어쩔 수 없이 알려주는 것일까? 혹은 "절대로 알려줄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버티는 것일까? 사실은 이렇다. 거북하거나 난처하게 느껴지는 전화, 긴요하지도 않은 전화라면 근무시간에도 싫고 사적인 시간에도 싫다. 이러나저러나 달갑지 않다. 그런 전화가 문제다.

 

한때 호황을 누리던 문방구점 자리의 커피숍에서 몇몇 '엄마들'이 정보를 주고받으며 난상토론을 벌이다가 석연치 않은 문제가 드러났는지 '대표 엄마'가 사정을 파악해서 알려주기로 한다. 그렇게 담임과 만만하게 지내는 경우 아예 반말을 섞어서 대화하는 이도 있다. 이쪽에서 반말을 '찍찍' 하면 저쪽(교사)도 질세라 '반말 짓거리'로 응수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시시콜콜 온갖 얘기를 다 한다. 어떻게 저런 얘기까지 하나 의아해진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현실이다.

 

교권침해? 그건 어떤 의미일까? 그렇게 만만한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다가 대판 시비가 붙는 것일까? 물론 참담한 결과로 이어지는 대화가 없진 않겠지만 극히 드물 것이다. 교사들 쪽에서는 근무에 지장을 주는 전화, 탐탁지 않은 전화, 불쾌한 전화도 교권침해에 포함시켜 응답했을 수 있다. 그들이 그런 전화를 교권문제로 봤다면 굳이 그렇게까지 해석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되물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물어봤자 별 수 없고 설득할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싫다면 교권문제가 되든 아니든 하지 않아야 옳다. 묻는 것 자체가 우습다.

 

마침내 서울교육청에서는 "휴대전화 번호는 희망하지 않을 경우 비공개"로 하고 오는 9월부터 업무용 휴대전화를 보급하여 사생활을 보호하기로 했다. 경기도에서도 그 필요성(사생활의 자유 침해, 인맥 공개, 부정 청탁 우려 등)과 법적 근거(개인 정보 보호)를 들어 교사의 연락처를 알리지 않아도 된다고 정했고, 충남에서는 휴대전화 하나로 개인용과 업무용 두 개의 번호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자, 이제 속이 후련해지는 걸까? 꼬인 매듭은 풀리고 학교 사회가 따뜻한 분위기로 바뀌게 될까? 학생을 가운데 둔 이상적 관계가 정립되는 것일까? 걱정거리가 있다. "용건만 간단히!"? 업무용 번호로는 시도 때도 없이 통화할 수 있는가? 교사의 전화번호가 알려지면 어떻게 하나? 알아낸 사람을 처벌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규제하게 되는가? 그럴 경우 더 정교하고 엄격한 규칙을 만들고, 더 정교하고 엄격한 통제를 가할 수 있는가? 통제하고 단속할수록 분위기만 점점 더 고약해지는 건 아닐까?

 

왕정복고시대의 영국 왕 찰스 2세가 웨스트민스터 학교를 찾아가 교장 리처드 버스비의 안내로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둘러보았다. 버스비는 왕 앞에서 모자를 쓴 채 당당하게 걸었고, 왕은 모자를 팔에 낀 채 교장의 뒤를 따라다녔다. 행사가 끝나고 교문 앞에 선 버스비가 비로소 허리를 굽혔다. "전하, 저의 무례를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이 학교에서 학생들이 저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저는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찰스 2세라면 어떻게 할까? 시도 때도 없이 학교에 전화를 하고 싶을까? 할 수 있을까? 존경받는 왕이었으니 오직 나라를 위해 버스비 교장을 존중해준 것이었을까? 그럼 그의 아들(왕자)이 그 학교를 다녔다면? 그도 별 수 없이 시시콜콜 전화했을까? 적극적인 생각도 해보자. 담임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건 일 년 내내 전화 한 통 하지 않고 지낸다 하더라도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또 이 각박한 세상에 내가 담임한 아이들 부모의 전화번호를 다 알고 있다는 것은 세상에 더없을 특권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