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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논단

모자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요?(2019.5.30)

by 답설재 2019. 5. 30.

 

 

 

 

《밤이 선생이다》(황현산)라는 책 속 이 일화에는 아직 학교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아이와 그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방문교사가 등장한다. "다음 그림에서 모자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 물음 아래 책을 읽는 사람, 모자를 쓴 사람, 낚시질을 하는 사람 그림이 나란히 제시되어 있다. 문제를 읽은 아이가 손가락으로 모자를 쓴 사람을 짚어주면 된다. "이 사람이에요!"

 

틀릴 리가 있을까? 결과를 확인하기 민망할 정도로 뻔하다. 문제를 읽을 수 있다면 그걸 해결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왜 그런 문제를 출제하는 것일까? 묻고 답하기 훈련의 필요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일단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반문했다. "내가 어떻게 모자 쓴 사람 이름을 알겠어요?" 이번엔 방문교사가 난감했다. 그 대답의 당위성은 인정하면서도 옳은 답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건 출제 의도에 맞지 않아서 미구에 학교에 들어가면 응당 모자 쓴 사람을 고르는 것(출제 의도대로 골라주는 것)이 정규교육이 요구하는 보편적 능력(요즘 식으로 하면 '기초역량'쯤?)이기 때문이다.

 

방문교사가 난감해한 것은 이런 경우 우리의 학교교육이 엉뚱한 혹은 의외의 답을 예상하거나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교육은 우선 아이의 반문(反問)을 장려하거나 응답자에 따라 각기 다른 답을 염두에 두는 번잡한 교육을 하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겨우 그 수준의 문제를 갖고 이러니저러니 일찍부터 토론을 벌이게 할 의향이 없다는 걸 방문교사도 잘 인식하고 있을 것이었다.

 

대체로 수업이 시작되면 주어진 학습목표를 인식한 다음, 수업시간의 대부분을 할애해서 세 가지쯤의 활동을 각본대로 수행한 다음 교사에 의해 예정된 묻고 답하기 과정을 거치고, 마지막으로 이번에도 교사가 준비한 몇 가지 간단한 선택형, 단답형 혹은 ○×(진위형) 문제를 해결하면 목표가 달성되는데 엉뚱하고 장난 같은 반문이나 토론이 그 목표 달성에 생산적으로 작용할 리 없다. 교사는 더 많이 설명해주지 못해 늘 애가 타고 속이 터진다. 또 그렇게 열변을 토하는 현상은 상급학교일수록 심하다.

 

방문교사와 아이의 얘기는 아주 간단한 상황 같기도 하고, 일정한 형식과 내용을 갖추었을 그 방문 교육의 의도대로라면 옆에서 지켜보던 부모는 '이 일을 장차 어떻게 하나?' 아이의 사고가 답답하다고 단정했을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우리 교육의 허점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일화의 등장인물은 아이와 사교육업체 방문교사지만 실제로는 우리나라 학교교육의 실상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더 직접적으로는 누가 뭐래도 아이가 얼른 학교교육의 경향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 되고 있다.

 

토끼와 거북이 저쪽 산꼭대기까지 경주를 했다. 이 우화에 대해 얘기해보라면 적어도 열 가지? 스무 가지? 값지고 신선한 견해가 끝없이 나열될 것인데 우리는 달랑 '노력'이라는 하나의 정답과 □□를 준비해놓는 가혹하고 무자비한 짓을 해왔다. 그 우화는 시시해졌다고?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런 수업과 평가의 세력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런 건 소품종 대량생산을 지향했던 산업사회의 공장모형 교육이라고 경멸하고 기업들은 벌써부터 그런 식으로 인력을 선발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교육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런 시험으로 그 좋은 학창시절을 보내야 하고, 수능방송도 청취하지 않을 수 없고, 각고의 노력에도 사교육비는 줄어들 기미가 없고, 고등학생 수면시간은 하루 6시간 미만인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이 답답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저 방문교사 앞의 아이가 제시한 건 아닐까? 어른들은 대부분 모자를 쓴 사람 그림을 선택해주기를 기대하지만 아이는 그 사람 이름을 알고 싶다. 그걸 당연하게 여긴다. 실없는 질문과 대답, 그런 객쩍은 일은 외면한다. 나만의 길을 가고 싶다.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이 시대의 교육이 가야할 길은 바로 교육의 개별화가 아닐까? 학습의 개별화, 성적관리의 개별화, 진로지도의 개별화, 대입전략의 개별화… 이런 일들은 지금 공교육이 전담하고 있는가, 혹은 사교육의 영향이 큰가? 어쨌든 그게 교육 본연의 길이겠지만, 이런 얘기를 하면 또 수업이란 정리된 지식을 잘 흡수시키는 것이므로 교사는 열변을 토해야 마땅하다는 강의를 듣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