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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논단

박물관으로 간 교과서 (2018.12.13)

by 답설재 2018. 12. 13.

 

 

 

 

'비만과 인간관계'를 탐구하고 있는 서영이는 인터뷰 자료처리에 골몰하고 있다. 식단과 생활습관 분석으로 비만 원인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활발하고 명랑하게 지내야 한다는 걸 주장하고 싶다. 선생님은 처음에 이 주제가 초등학교 5학년이 해결하기에 힘들지 않겠느냐고 했고, 기간을 두 달로 한 계획도 무리라면서 석 달 동안 진행하자고 했는데 그새 두 달이 지났다.

 

서영이는 컴퓨터로 자료처리를 하기 전에 계산 원리부터 알아내려고 일주일째 궁리하고 있다. 어제는 덧셈과 곱셈, 뺄셈과 나눗셈의 관계를 발견했다고 환호성을 올렸다. 보고서 내용에 따라 멋있는 랩과 누구라도 빠져들 5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도 보여주겠다고 했다. 편집만 남았단다.

 

선우는 오전에는 정보도서실에서 지낸다. "코스모스"(칼 세이건)라는 책의 이름에 반하여 그 두꺼운 책을 읽고 싶어 했다. 사서 선생님은 초등학생을 위해 편집된 "코스모스"가 없다면서 담임 선생님과 셋이서 계획을 세우고 휴대용 디스플레이로 그 책 속의 우주를 탐험하게 해주었다. 지구를 떠나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천왕성‧해왕성을 차례차례 찾아가는 우주선 탑승 간접체험을 하면서 아무래도 생선요리 전문 셰프가 되려던 꿈을 접고 이론물리학을 연구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번 시즌에 선생님을 고민에 빠지게 한 건 예원이었다. 옛날 학생들은 무엇을, 왜, 어떤 방법으로 공부했는지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러 날 교과서박물관을 방문하고 있는데 '교과서'라는 이름의 책들을 살펴보고 탐색할수록 당시의 공부에 대해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할머니 할아버지 시절만 해도 정답 고르기 문제풀이가 아주 중요했단다. '정답'이란 교과서의 지식에 따라 출제된 문제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단 한 가지의 답이었단다. 세상에! 학생들은 마치 기계처럼 정해진 시간에! 남보다 빨리! 실수 없이! 그 정답을 가려내는 '시합(競爭)'을 했으므로 토론 같은 건 거의 불필요한 활동이었다. 모두들 똑같은 교과서를 가지고 선생님의 설명을 경청한 것이었다. 대학도 마찬가지여서 교수님 농담까지 다 받아쓰고 외워야 학점을 잘 받을 수 있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처구니없긴 하지만 대학입시 같은 중요한 시험에서는 글을 써서 발표하고 토론하고 평가하는 일은 가능한 한 하지 않기를 바라고 그걸 공정하다고 좋아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선행학습'으로 학교에서 배우기 전에 남들보다 먼저 배우고 정답 찾기 연습을 해서 공부에 넌덜머리를 내는 학생이 많았단다. 왜 그처럼 쓸데없고 고통스럽기만 한 짓을 했을까. 우리가 지금 서로 다른 공부를 하고 서로 다른 체험을 하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그때는 전국의 수많은 학생들이 똑같은 내용을 빠짐없이 배우는 것이 절대적이었다니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부모들은 자녀가 교과서를 들여다보면 좋아하지만 혹 다른 책을 읽으면 걱정을 하고 혼을 내기도 했단다. 그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교과서의 지식을 외우는 데만 혈안이 되었다니,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왜 만들었는지, 어디에 썼는지, 인터넷도 있었다지만 뭘 검색했는지, 어른들은 학생들이 차라리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되기를 원했던 것인지, 궁금한 것은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예원이는 마침내 이런 질문을 적어 놓았다. "똑같은 교과서로 똑같은 내용을 일제히 배우게 했다면 학생들이 똑같은 걸 알고 똑같이 생각하기를 바란 것일까요?" "…" "서영이는 지금 곱셈나눗셈 공식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 공부를 왜 동시에 일제히 해야만 했을까요?" "…" "로봇이 잘 알고 있는 걸 왜 사람이 다 암기하게 하고 그걸 대단한 힘으로 여겼을까요?" "…"

 

교과서 자유발행제 얘기가 오가고 있다. '교과서'라는 이름을 가진 책들이 사라진 교실을 떠올려보았다. 무수한 교재들이 교실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교과서'라는 이름의 교재가 지나치게 오랫동안 독점한 것은 아니었을까? 세상은 엄청 빠른 속도로, '완전'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다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