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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논단

신명 날 리 없는 교사들 (2019.2.15)

by 답설재 2019. 2. 16.

 

2018.11.24.

 

                                                                                                 

 

 

겨울만 되면 교문 위에 달리는 현수막은, 보나마나 똑같은 "불조심 강조 기간"인 시절이 있었다. 그것까지 교장이 정할 이유도 없고 언필칭 창의성을 길러주는 곳이 학교니까 멀쩡한 아이들 두고 교장이 그렇게 해서도 안 되지만 그런 것까지 일일이 통보하고, 지시·명령하고, 살펴보고, 관리·감독하는 곳이 상급관청이고 관내 행정기관이었다.

 

인용이 괜히 낯간지럽다. "화재 발생 빈도가 높은 겨울철을 대비하여 방화환경 조성을 통한 시민의 화재예방 및 안전문화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협조 요청하오니 안전하고 내실 있는 방화환경 조성 확산에 적극 동참"해 달라는 공문이 일찌감치 온다. 거기에는 "당년 11.1~익년 3.31 / 불조심 강조의 달(혹은 '화재! 당신의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다!') / ○○기관”을 3행으로 배치하라는 안까지 제시되어 있다. 문안도 걱정 없다. "설마하면 큰일날불 조심하면 안전한불" "크고작은 화재사고 알고보니 순간방심" 같은 예시가 풍부하게 실려 있다. 얼마나 구체적이고 친절한가?

 

이 '매뉴얼'을 제쳐놓고 공모를 거쳐 "우리가 불을 가지고 장난치면 불은 세상을 망쳐요!" 7세 아이가 지은 표어를 문안으로 한 현수막을 만들었다. 그 시답잖고 하찮은 변화에 아이들도, 교사와 학부모들도 신기해하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까지 "공연한 일로 교육과정 운영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성토로 우여곡절을 겪었다. 새로 부임한 교장으로 하여금 '하던 대로' 하면 편하고 뒤탈이 없다는 걸 깨닫도록 하려고 교사들은 갖은 설득 작전을 폈다. "지금까지 그렇게 했다" "위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괜히 난처한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을 강조했고, 자신들의 중차대한 의무는 '진도빼기'이며 아이들에게 필수지식을 다 암기시키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누가 학교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누가 매뉴얼대로 움직이도록 만들어놓았을까?

 

신기한 것은 "꺼진불도 다시보자 자나깨나 불조심" 같은 4·4조에 비해 엉성하고 허접한 표어로 만든 현수막이 나붙자 이번엔 그 교사들도 기뻐하고 즐거워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학교교육과정'의 본래 모습이고 그 수준을 높이는 것임을 금방 시인했다.

 

그들을 지금 다시 만나 "교사란 어떤 사람인가?"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 좋은 인성을 길러주는 사람? 진급·진학을 시켜주는 사람? 교과서 내용을 전달해주는 사람?…. 학부모나 학생들은, 교사 자신들은 또 어떤 답지를 고를까?

 

학교 폭력 문제를 물어봐도 좋겠다. 폭력의 강도에 따라 점수를 매겨 가해 학생을 조치하라는 기준(서면사과, 접촉·협박 및 보복행위 금지, 교내봉사, 사회봉사, 특별교육 이수 혹은 심리치료, 출석정지, 학급교체, 전학, 퇴학처분)에 무력감을 느끼지는 않을까? '학폭'이 매뉴얼에 맞춰 일어날 리도 없지만, 점수를 잘 매기는 것으로 끝날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이런 관점이라면 가벼운 사건은 학교폭력대책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처리할 수 있게 한 최근의 조치는 아주 작지만 긍정적이다!).

 

그동안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의 등장에 따라 직업별 인공지능 대체 예측이 여러 차례 발표되었다. 재미있기로는 가령 옥스퍼드대 발표에서는 초등교사 대체 가능성이 0.44%(전화상담원·회계관리인·심판·부동산중개인·택배기사 94~99%)였는데, 한국고용정보원은 "극심한 구직난을 겪을 분야를 의약(51.7%)·교육(48.0%)"으로 예측했다.

 

한쪽은 "기계 따위가 교육이라니!" 했고, 다른 쪽은 '지식의 축적에서 이미 인간을 추월해버린 인공지능과 끝까지 겨루어보겠다는 교육의 무모함'을 우려했을 것이었다. 교육이 하는 일에 대한 관점에서 실로 현격한 차이를 보인 것이다.

 

일자리가 귀하다지만 올해도 명퇴 신청 교사 수는 평년 수준이었다. 명퇴의 맥락에 대해서도 교권추락 운운했을 뿐이었다. 교사들이 명퇴 사유를 공표할 리도 없고 정작 뚜렷한 이유를 설정해 놓았을 리도 없다. 사실은 교단에 서는 이들의 정서가 문제다.

 

'진도빼기'나 뭐나 매뉴얼대로 하라면 신명이 날 리가 없다. 그들도 바탕은 전문직이기 때문이다. 여느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인정해주는 사회를 기대하는 직종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필 썰렁한 마음을 갖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본래 아이들의 편이어서 우리도 어서 아이들 편에 서주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