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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에이, 바보! 눈이 오잖아!

by 답설재 2018. 11. 24.






에이, 바보! 눈이 오잖아!






선물처럼 내리는 눈을 뭉쳐 선물처럼 안고 가는 아이





    1


  아파트로 올라오는 길섶과 소공원은 어수선합니다. 잔치가 벌어졌던 이튿날 아침의 마당같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찬란한 빛깔이던 낙엽이 여기저기 수북수북 쌓여 있습니다.


  금요일 오후여서 우리는 토, 일요일 이틀 동안에는 얼굴도 못 보기 일쑤입니다. 녀석은 주말이 즐거울까요? 나는 다음 월요일 아침을 생각하며 걷습니다.

  "눈은 언제 와?"

  녀석이 갑작스레 물었습니다.

  "글쎄……."

  "대충 언제쯤이야?"


  순간, 며칠 안으로는 눈이 올 것 같지도 않고, 이거 참 난처하다 싶어서 애매하게 느껴질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일단 저기압이 몰려와야 눈이 올 텐데?"

  "아, 그 저기압이 언제 몰려오냐고!"

  "모르겠어. 일기예보를 봐야 알겠는데……."



    2


  이런, 바보!

  "어디 보자!" 하고 스마트폰 상단의 일기예보 아이콘을 클릭하면 정보가 주르륵 쏟아지는데……. 거기엔 일주일치 장기예보도 보기 좋게 제시되어 있는데……. 심심하면 열어보는 그것이 그 시간에는 왜 생각나지 않았는지……. 아침 뉴스 시간에 서너 번씩 등장하는 그 기상 캐스트만 생각났는지……. 스마트폰은 왜 갖고 다니는지……. 바보라는 걸 증명하려고?


  나는 녀석과 녀석의 담임 선생님 앞에만 서면 늘 '바보'가 되고 맙니다. 그런대로 돌아가던 머리가 아주 '팽' 돌아버리거나 '콱!' 막혀버립니다.



    3


  녀석이 실망했겠지요?

  '할아버진 별 수 없군. 도대체 쓸모가 별로 없단 말이야! 어제는 바람 부는 날 솜사탕은 온갖 먼지가 다 들러붙는다고, 마치 독약을 먹는 거나 같다고, 바람 부는 날에는 바람을 타고 마녀도 따라와 솜사탕에 들러붙을지 모른다고 귀에 대고 얘기하더니만…… 솜사탕은 구경 뿐이고 허구한 날 쿠기, 요구르트, 에이, 지겨워!'


  저기압 따위는 경비실 옆을 지나며 이야기했고, 소공원을 가로질러 오르는 계단을 녀석은 단숨에 뛰어올라서 헉헉거리며 따라가는 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녀석은 어떤 생각을 더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눈 같은 건 곧 잊고 말았습니다. 치매 전조 현상만 아니면 좋겠는데…….



    4


  아침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무슨 첫눈이 곧장 함박눈이 되었고, 한 시간쯤 지나자 버스도 다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녀석은 무얼 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눈 오는 걸 내다보고 있겠지? 아니야, 이미 밖으로 나갔겠지?'

  '지금 이 시간에는 내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아니야! 이제 눈 내리는 날만 되면 내가 생각나는 건 아닐까? 심지어 내가 죽은 다음에도?'


  ― 바로 이튿날 눈이 쏟아지는 것도 알지 못했던 나의 바보 할아버지,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도 그냥 쩔쩔매기만 한 불쌍한 나의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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