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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허윤정 《그대 손 흔들고 가시는 꽃길에》

by 답설재 2018. 3. 25.

허윤정 단상집 《그대 손 흔들고 가시는 꽃길에》

황금알 2017

 

 

 

 

 

 

 

 

 

 

 

"학장님!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면, 잔잔하게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시겠지요.

 

야생화 보러 가자는 말씀에

후유증 때문에 따라다니기조차 어려울 것 같아서

언제 사진 찍으시고 산아래에서 뵙기로 했는데

허사(虛辭)가 되었습니다.

산 아래 식당을 보면서도 생각했습니다.

 

'자랑스런 편수인상' 말씀도 생각납니다.

아직 젊은 사람들이 너무 이르지 않느냐고 하셨을 때,

선배들께서는 마치 자신들만 겪은 일인 양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해서 진저리가 난 후배들은

마침내 우리 회를 외면하게 됐다고, 전혀 그렇지 않은 학장님께

'오죽하면 나에게 이 말씀을…….' 하지 못하고

'그런 말씀을 왜 하필 나에게?' 하였습니다.

 

이제 제 차례가 된 것 같아 더 쑥스럽습니다.

과분하고 아직은 아니라고 사양했는데

이미 정해졌다고 했습니다.

저는 왜 이렇게 용렬(庸劣)해진 걸까요.

 

지지난 주 토요일,

편관회 모임에 나갔다가 사모님을 뵈었습니다.

 구차한 말씀을 드려야 했는데

보는 이가 많아서 그만두었습니다.

구태여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 이해하시겠지만, 언제든

말씀드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헤어질 때 이 책을 주셨습니다. 바로 주시지 않고

헤어질 때 꺼내 주신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시작해서

저녁 내내 읽고, 가까이 두었습니다.

 

 

 

 

그대 손 흔들고 가시는 꽃길에

 

 

 

먼저 피는 봄꽃이 벙글고 있다.

꽃들도 그의 부재를 알고 있을까.

만 번이나 더 불러주던 이름

그 목소리 지금도

빈 하늘 붉은 노을로 번진다.

 

이승과 저승의 먼 거리

나 여기에 있고

그대 먼 그곳에 있어

이 허허한 마음

그대 아침마다 모이 주던 향나무 둥지엔

이제 새들의 발길도 뜸하다.

 

소파에 기대 나의 귀가를 기다리던

그이가 무척 그립다.

어느 날 고향집 산모롱이

우리 다시 만나 지리산 산나물

들기름에 무치고 된장국 밥상을 마주하고 싶다.

 

 

 

작별 인사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내놓을 것 없음에도 끝낼 수가 없을 듯합니다.

 

다시 봄입니다. 그곳에서는 강 건너오는 봄길을

더 잘 보실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