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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죽음은 져야 할 짐이고…"

by 답설재 2018. 1. 7.

찰스 부카우스키(Charles Bukowski)에 관한 기사를 봤습니다.1

거친 삶과 가식 없는 문체로 유명한 그는 묘비에 '애쓰지 마라(Don't Try)'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나 참, 이런 엉터리가 있나 싶지만 때론 그럴 것 같기도 합니다.

노동자 아버지가 "불 꺼!" 하고 소리를 질러서 침대 시트 속에 전등을 넣고 책을 읽다가 시트에 불이 붙은 적도 있을 정도였는데 대학을 중퇴하고 첫 단편을 발표했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아서 날품팔이 잡역부, 철도 노동자, 트럭 운전사, 경마꾼, 주유소 직원, 우편집배원 같은 일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얼마나 술을 마셔댔던지 어느 날 입과 항문으로 피를 분수처럼 쏟아냈답니다.

쉰 살 때 돌연 "우체국 의자에 앉아 죽고 싶지 않아!"라며 사표를 내고 타자기를 구해서 다시 글을 썼습니다.

 

그 기사를 다시 찾아 읽고 단 한 권밖에 읽지 못해서 쑥스럽지만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The Captain is Out to Lunch and Sailors Have Taken Over the Ship》의 "옮기고 나서" "부카우스키에 대하여"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는 그의 일기(《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여러 곳에 나타나 일렁거리지만 한 군데만 옮겨보았습니다.2

 

그들3은 대부분 꽤나 괜찮은 사람들이다. 내 생각엔 그들은 인간들을 오랜 세월 접하다 보니 일종의 통찰력이 생긴 듯하다. 예를 들어, 인간 족속 대부분은 그저 커다란 쓰레기 더미라는 걸 그들은 안다. (…) 경마장엔 뭔가 있다. 내 말은, 예컨대, 거기 나가 있으면 죽음에 관해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거다. 거기 나가 있으면 내가 너무도 멍청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느낌이 드니까. (…)(124)

 

대기는 생기 없이 묵직하고, 우린 죄다 자발적으로 수용소에 갇힌 자들이다. 집에 돌아오면 그제야 난 죽음에 관해 곰곰이 생각할 수 있다. 그리 많이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난 죽음에 관해 걱정하지도 않고 죽는다는 게 슬프지도 않다. 죽음이 그저 좀 성가셔 보일 뿐이다. 언제? 다음 수요일 밤? 아니면 내가 자고 있을 때? 혹은 다음번의 지독한 숙취 때문에? 교통사고? 죽음은 져야 할 짐이고, 꼭 해치워야 하는 그 무엇이다. 그리고 난 신에 대한 믿음 따윈 없이 떠나갈 거다. 그게 좋겠다. 죽음에 맞대면할 수 있을 테니까. 죽음은 아침에 구두를 신는 것처럼 반드시 해야 하는 그 무엇이다. 글을 못 쓰게 되는 게 서운할 거라 생각한다. (…) 지옥이 있을지도 모른다. 안 그런가? 지옥이 있다면 나도 거길 갈 텐데, 거기가 어떨지 아는가?4(125)

 

 

 

로브트 크럼 그림(이 책 155면)

 

 

멋진 블로그 《봄비 온 뒤 풀빛처럼》에서 '문득문득 또는 불현듯 정성을 들이는 일들이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글을 읽고 다음과 같은 감상을 썼습니다.

 

"부질없다" "경계선이 모호해진다"............
문득 아득해집니다.
'내가 이렇게 골골해도 아무래도 오래 살아남아서 주변이 힘들게 하지 싶다'는 께름칙한 느낌이 강하다가도
오늘처럼 아주 힘들 때면 이러다가 '예상대로 일찍 죽었구나' 소리를 듣지 않을까 싶어 역시 께름칙해집니다.

 

그렇긴 하지만 저 부카우스키의 글을 생각하면 그렇다고 해서(죽는다고 해서) 큰일 날 일도 없고 다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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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일보 2017.12.22. [장석주의 사물극장] [25] 묘비에 '애쓰지 마라' 쓴 찰스 부코스키
2.《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Henry Charles Bukowski The Captain is Out to Lunch and Sailors Have Taken Over the Ship(1998) 찰스 부카우스키, 로버트 크럼 그림, 설준규 옮김 모멘토 2015
3. 경마장 직원들.
4. 이렇게 이어집니다. '시인들이 죄다 거기서 제 작품들을 읽어댈 테고 난 꼼짝없이 들어줘야겠지. 그자들의 의기양양한 허영심과 넘쳐흐르는 자부심에 난 익사할 지경이겠지. 만약 지옥이 정말 있다면 바로 그게 내 지옥일 거다. 시인들이 한 명씩 끝없이 자기 시를 읽어대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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