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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일상(日常)'

by 답설재 2017. 12. 7.












'일상(日常)'






  (…) 얼음같이 차가운 물에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손을 담그고 소다 비누로 씻어내는 통에 난생 처음 동상에 걸리기도 했다. 개인이 구입해야 하는 구두는 지독히도 발가락을 죄었다. 모든 유니폼이 그렇지만 교육생 유니폼은 개인의 정체성을 잠식했으며, 치마 주름을 다리고, 캡에 핀을 꽂고, 솔기를 빳빳이 세우고, 구두 특히 뒤축을 윤내야 하는 등 매일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으므로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줄었다. 수련 간호사로서 드러먼드 수간호사 밑에서(절대로 수간호사와 '함께'가 아니다) 병동 일을, '변기'에서 '수프'까지의 일상 업무를 시작할 때쯤 되자, 이전의 삶은 희미해져버렸다. 마음이 텅 비어버렸고, 방어기제는 사라지고 없었으므로 수간호사의 절대적인 권위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수간호사가 그들의 비어버린 마음을 새로운 주의사항으로 채우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저항도 있을 수 없었다.

  (…) 그녀는 다른 일에 대해서는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늦은밤 잠자리에 들기 전, 창가에 서서 불이 꺼진 도시와 강을 바라볼 때면 병실뿐만 아니라 저 밖의 거리에도 퍼져 있는, 마치 어둠 같은 불안을 기억해냈다. 피곤한 일과나 드러먼드 수간호사조차 그녀를 불안으로부터 보호해줄 수는 없을 듯했다.



  이언 매큐언 장편소설 『속죄』1를 읽다가 나의 그 일상들을 떠올리고 '정말 그래!' 하며 옮겼습니다.

  다른 점은 저 수련 간호사는 '일상'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 '일상'에서 나온 점입니다.

  들어가고 싶어서 들어가고 나오고 싶어서 나오는 사람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1. 문학동네, 2015, 1판26쇄, 385~38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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