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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올리버 색스 「안식일Sabbath」

by 답설재 2016. 9. 8.

「안식일Sabbath」 (올리버 색스가 마지막에 쓴 글)1

 

 

 

 

 

 

(……)2

1946년 나는 비교적 꽉 찬 시나고그에서 친척 수십 명과 함께 바르 미츠바Bar Mitzvah(유대교에서 남자아이가 13세가 되면 행하는 성인식으로 예배에서 그날의 기도문을 읽는다―옮긴이) 낭독을 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이 공식적인 유대교 의식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성인 유대교 신자의 의례적 의무를―가령 매일 기도하는 것, 평일 아침 기도하기 전에 몸에 테필린tefillin(이마와 팔에 가죽 끈으로 매다는 작은 성물함―옮긴이)을 두르는 것―따르지 않았고, 부모님의 신앙과 습관에도 자주 무심해졌다. 그 과정에서 딱히 결정적인 단절의 계기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내 성적인 감정을 캐물으면서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털어놓도록 몰아붙였던 것이다.

"아무 것도 한 건 없어요." 나는 말했다. "그냥 감정뿐이에요. 하지만 엄마한테 말하지 마세요. 엄마는 받아들이지 못할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곧장 말했다. 이튿날 아침, 어머니는 경악스런 표정으로 내려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혐오스러운 것. 너는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 (어머니는 틀림없이 레위기의 이 구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누구든 여자와 한자리에 들듯이 남자와 한자리에 든 자가 있으면 두 사람은 혐오스러운 짓을 한 것이니, 그들은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고 피를 흘려야 마땅할 것이니라.")

우리는 그 문제를 두 번 다시 언급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가혹한 말은 내게 종교가 얼마나 편협하고 잔인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1960년에 의사 자격을 획득한 뒤 급작스럽게 영국을, 그리고 영국에 있던 가족과 공동체를 떠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신대륙으로 향했다. 로스앤젤레스로 간 나는 머슬비치의 역도선수들, 그리고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 신경학과의 동료 레지던트들 사이에서 나름의 공동체를 찾았다. 그러나 나는 내심 삶에서 그보다 더 깊은 관계를―'의미'를― 갈망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없었기 때문에 190년대에 자살에 가까울 정도로 암페타민에 중독되었던 게 아닐까 싶다.

회복은 더디게 진행됐다. 뉴욕 브롱크스의 만성질환 병원에서 의미 있는 일을 찾은 게 계기였다(《깨어남》에서 '마운트카멜' 병원이라고 말한 곳이다). 나는 그곳 환자들에게 매혹되었고, 그들에게 깊이 마음을 썼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주는 것이 내 사명이라고 느꼈다. 일반 대중, 나아가 동료 의사들 중에서도 많은 수는 전혀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소명을 발견했고, 그것을 집요하게, 일편단심으로, 동료들의 격려는 별로 받지 못한 채로 추구했다. 그러다 보니 거의 부지불식간에 나는 의학적 내러티브가 거의 멸종한 시대의 이야기꾼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그렇다는 사실이 나를 단념시키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가 19세기의 위대한 신경학 사례 연구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이 점에서 위대한 러시아 신경심리학자 A. R. 루리아는 내게 격려가 되었다). 이후 내가 오랫동안 이어간 생활은 외롭지만 대단히 만족스러운, 거의 수도사 같은 존재 양식이었다.

(……)3

1955년 스물두 살이었던 나는 이스라엘에 가서 몇 달 동안 키부츠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즐거웠지만, 다시 가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아주 많은 사촌들이 그곳으로 이주해서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중동의 정치 상황이 심란하게 느껴졌고, 독실한 종교적 사회에 내가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2014년 봄 사촌 마저리가―한때 내 어머니의 제자로서 의사였던 마저리는 아흔여덟 살까지 일했다― 죽어 간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작별 인사를 위해 예루살램으로 전화를 걸었다. 뜻밖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강건하고 낭랑했다. 내 어머니를 쏙 빼닮은 억양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지금 당장 죽을 마음은 없어. 6월 18일 내 백 살 생일은 치러야지. 너도 올래?"

나는 대답했다. "그럴게요!" 전화를 끊자, 60년 가까이 고수해온 결심을 몇 초 만에 뒤집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어차피 그것은 순수한 가족 방문이었다. 나는 마저리의 백 세 생일을 그녀와 그녀의 대가족과 함께 축하했다. 런던 시절에 친하게 지냈던 사촌을 두 명 더 만났고, 육촌이나 그보다 더 먼 친척은 셀 수도 없이 많이 만났으며, 물론 로버트 존4도 만났다. 나는 유년기 이래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가족의 품에 안기는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나는 연인 빌리와 함께 정통 유대교 친척들을 찾아가는 것에 대해 다소 걱정하고 있었다. 어머니 말이 여태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빌리도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다. 정통 유대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태도가 얼마나 크게 바뀌었는가 하는 것은 로버트 존이 빌리와 내게 안식일을 여는 첫 식사를 자신의 가족과 함께하자고 초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날 안식일의 평화, 세상이 멈춘 평화, 시간 밖의 시간이 주는 평화는 꼭 손에 잡힐 듯했다. 주변 모든 것에 평화가 스며 있었다. 나는 어쩐지 노스탤지어에 가까운 애석한 감정에 젖어서 자꾸 '만약에'를 떠올렸다. 만약에 A와 B와 C가 달랐더라면 어땠을까? 만약에 그랬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어떤 삶을 살았을까?

2014년 12월 나는 자서전 《온 더 무브》를 마무리해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다. 그때만 해도 불과 며칠 후 내가 9년 전에 발생했던 흑색종으로 인한 전이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기 전에 자서전을 마무리한 것이 기쁘다. 그리고 평생 처음으로 세상을 숨김없이 마주해서 내 내면에 죄책감 어린 비밀을 가둬 두지 않은 채, 나의 성적 취향까지 솔직하게 밝힐 수 있었던 것이 기쁘다.

2월이 되자 암에 대해서도, 내가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솔직하게 털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야기를 쓴 글 '나의 생애'가 〈뉴욕타임스〉에 실리던 날 나는 병원에 있었다. 7월에도 같은 매체에 글을 썼다. '나의 주기율표'는 물리적 우주에 대해서, 또한 내가 사랑하는 원소들에 대해서 이야기한 글이다.

그리고 이제 쇠약해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한때 단단했던 근육이 암에 녹아 버린 지금, 나는 갈수록 초자연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이 아니라 훌륭하고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생각이 쏠린다. 자신이 내면에서 평화를 느낀다는 게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안식일, 휴식의 날, 한 주의 일곱 번째 날, 나아가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일곱 번째 날로 자꾸만 생각이 쏠린다. 우리가 자신이 할 일을 다 마쳤다고 느끼면서 떳떳한 마음으로 쉴 수 있는 그날로.

 

 

 

두 부분을 생략했습니다.

여기 옮긴 부분들이 더 간절한 것 같았습니다. 올리버 색스에게 묻는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입장에 따라서는 생략한 부분이 더 중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그런 사람을 둘이나 만났습니다. 하나는 동급생이었고, 다른 하나는 낯선 '아저씨'였습니다. 나는 집을 떠나 혼자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집요한 관찰로 최적의 시간에 내 손을 잡거나 입술을 포개어 보았을 것입니다.

순간, 정말 싫었습니다.

다행히(?) 당장 "싫다"는 표현을 할 수 있었습니다.

더 다행한 것은 그들은 순순히 물러갔습니다.

그것은 성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과 사귄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렇다면 이쪽에서 그런 접근을 경계해야 한다는 우려는 전혀 쓸데없는 일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의견을 나누거나 하기는 더욱 싫습니다. 아니,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내게는 기본적인 상식조차 없고, 따로 공부해서 논의할 만한 의욕이나 여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동정심이라면 많이 주제넘겠지만, 이 메모는 다만 올리버 색스의 이야기를 읽은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일 것 같았습니다.

그는 어머니와 헤어진 후로는 그 어떤 사람이 이야기해도 유대교에는 결코 고개를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의 사촌 생일에 초대를 받았고, 그곳에서 난생처음으로 '평화'를 느꼈고, 그 사촌이 어머니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A와 B와 C가 달랐더라면……. '어머니의 역할'을 한 그 사촌은 생애 처음으로 그에게 진정한 평화를 선물한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어머니의 뜻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드디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공개했습니다. 죽음의 직전에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쓴 책들을 좀 읽어보려고 합니다.

무엇이든 알고 싶다는 이 생각은 나로서는 간절한 면이 있습니다. 이 생각은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에겐 아주 사소한 문제일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죽음에 이르면 누구나, 무엇이든, 올리버 색스처럼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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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리버 색스「안식일」『Gratitude 고맙습니다』(김명남 옮김, 알마 2016), 43~57.
2. 생략한 부분 : 어린시절, 런던 북서부 크리클라우드의 독실한 정통 유대인 마을의 경건하고 따듯한 가정생활, 특히 안식일에 관한 추억.
3. '유대인으로서의 신앙심 깊은 사촌 로버트 존 아우만, 안식일이 부여하는 완벽한 평화, 세상사로부터의 거리 두기에 대한 헌신이 너무나 확고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존과의 친교에 관한 이야기. 로버트 존은 그에게 심지어 '안식일 준수는 아주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죠. 그것은 단지 사회를 향상시키는 일 따위가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시간입니다.' 하고 말했다. 올리버 색스가 얼마나 가슴아팠을 것인지는 이 두 사람 이야기로써도 충분하다.
4. 위 각주의 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