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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한 명》(抄) Ⅱ

by 답설재 2016. 8. 9.






김숨 『한 명』(抄) Ⅱ

『현대문학』 장편연재소설1








  어슴푸레한 새벽 그녀는 홀로 깨어 있다. 자신 앞에 누군가 앉아 있다고 생각하고 입을 뗀다.


  "첨에 갈 적에4)……."


  "첨에…… 내가 만주까지 어떻게 끌려갔느냐 하면……."


  "만주 얘기 난 누구한테 안 해. 창피해서5)…… 동기간들한테도 말 안 했어. 고향은 가기 싫어. 고향에 누가 있어야 가지. 어떤 이는 위안부였다고 신고를 하니까, 방송국에서 나와 사진도 찍고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나 봐. 정부에서 받은 지원금으로 집을 지었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마실을 오던 이웃 여자가 발을 딱 끊더래. 씹 팔아가지고 집 지은 거라구, 더럽다구.6)"


  "만주…… 거길 어떻게 잊어버리겠어?7)"

  "지금도 아래를 바늘로 콕콕콕 쑤시는 것 같아8)……."


  "열네 살짜리는 어떻게 한 줄 알아? 겨우 열네 살짜리를 보고 성숙이 안 됐다고 욕하고 때리고…… 그래도 말을 안 들으니까 우리 앞에 세워놓고 칼로 가슴을 째고…… 옷이 다 찢어지고 피가 막…….9)







  그녀는 평택 조카가 원망스럽지만 원망하고 싶지 않다. 세상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증오하고 싶지 않다.25)


  50명 남짓 남았을 때, 그들 중 한 명도 그렇게 말했다. 증오하고 싶지 않다고. 원한을 품고 싶지 않다26)고.

  그이는 다른 말도 했다.

  내게 일어난 일들을 용서할 수 없다.27)


  그이에게 일어난 일들은 그녀에게 일어난 일이기도 했다. 그녀 또한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용서할 수 없다.

  그 한 마디를 들으면 용서가 되려나?

  신神도 대신 해줄 수 없는 그 한 마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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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윤순만(1929년 출생).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협의회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 증언팀 엮음. 풀빛, 2000.

  5) 김복동(1925년 출생),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 김복동 할머니의 증언 내용을 토대로 작가가 재구성했음.

  6) 김영자(1923년 출생),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

  7) 정윤홍(1920년 출생),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

  8) 최화선(1927년 출생), 『강제로 끌려간 군 위안부들 3

  9) 이옥선, 천지TV, 2014년 8월 15일 방송.


 25) 이용수, 2015년 4월 21일 증언을 위해 워싱턴을 찾은 이용수 할머니의 특파원들과의 인터뷰 내용 중에서 인용.

 26) 이용수

 27)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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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숨 1974년 울산 출생. 1997년 『대전일보』, 1998년 『문학동네』 등단. 소설집 『투견』 『침대』 『간과 쓸개』 『국수』 장편소설 『백치들』 『철』 『나의 아름다운 죄인들』 『물』 『노란 개를 버리러』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바느질하는 여자』.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수상.




                                                    《한 명》(抄) http://blog.daum.net/blueletter01/7638821





                                                                                     단행본 《한 명










  1. 2016년 6월호, 61~89쪽(제5회, 마지막회). 65~66, 86, 88~89쪽에서 옮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