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과서, 어디쯤 가고 있나
우리는 우리나라 학교교육이 웬만한 수준은 유지하고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어느 교사의 수업이 '우물쭈물' '우왕좌왕'이라면 당장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령 다음 시간에는 시장의 기능을 가르치게 되었다면 교사들은 '무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기 마련인데, 그 '무엇을' '어떻게'에 대하여 국가에서 정해 놓은 기준이 '교육과정'이다.
이론적으로는 이 기준만 있으면 수업을 전개할 수 있지만 모든 교사에게 그런 수준을 요구할 수는 없다. 또 교육과정을 잘 알고 있다고 해서 꼭 훌륭한 교사도 아니며, 구체적인 교육목표와 내용에 대한 교사들의 수준이 천차만별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수준도 그렇지만 그들의 견해나 경험, 개성 또한 다양하다. 그렇다고 해서 개별 사정을 평준화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견해, 개성이 바람직한 것이라면 오히려 잘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옳다.
교사들이 "무엇으로 가르쳐야 하는가?" 물었을 때 "이런 자료를 활용할 수 있다" 혹은 "꼭 이 자료를 활용하라"고 답하면서 "최소한의 수준은 유지해야 한다"는 요구를 할 수도 있다. 그 자료가 교과서다.
그렇지만 '시장의 기능'에 대한 수업의 구상은 마치 예술가들처럼 교사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교사는 슈퍼마켓, 재래시장, 전문점들, 백화점, 노점 등을 직접 둘러보는 게 좋다고 주장할 것이고, 어떤 교사는 "교실에서 차근차근 설명하는 게 최고!"라고 할 수도 있다. 또 어떤 교사는 각종 인쇄물과 인터넷으로 공부하는 게 효과적이고 편리한 증거를 댈 것이고, '시장놀이'가 유용하고 흥미롭다고 믿는 교사도 많다. 더구나 이런 구상은 학교급·학년, 지역, 상황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교사들의 수준, 경험, 개성이 다양하다고 했지만, 학생들의 특성은 더욱 그렇다. 교과서가 다양해야 한다는 견해는 바로 이런 사정에 따른 것으로 당연히 바람직한 관점이다.
"이 교과서로써 가르쳐야 한다!"(그런 경우가 있을 것이다)고 할 때의 교과서가 대개 단일본의 국정이다. 또 "정부에서 심사를 통해 교과서로 인정했으니까 이중에서 골라 써라"는 교과서가 검·인정이다. 우리는 대체로 교육부에서 심사하면 검정, 교육청에서 심사하면 인정 교과서지만 이미 출판된 책을 학교에서 사용할 수 있게 허가하여 인정 교과서라고 하는 나라도 많다.
이처럼 교과서가 국정, 검정, 인정 등 여러 가지인 걸 보고 다양하다고 한다면 학생들은 의아해 할 수 있다. "우리 마음대로 고를 수도 없고, 더구나 오직 한 가지만 쓰는데 뭐가 다양하다는 건가?" 말하자면 그건 공급의 다양성일 뿐이고, 교사가 전체적·일방적으로 내용을 설명하고 학생들은 단지 경청하는 수업에 특히 유용할 뿐이다.
얼른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는 교재(자료)가 다양해질 때 비로소 학습의 원리에 따른 다양성이 실현된다. 한 가지 교재를 획일적으로 설명하는 수업이 아니라 마치 학자들처럼 다양한 자료를 활용한 '자기 주도적 학습' '개별학습'이 이루어져야 학습자 수준에서 교재의 다양성이 실현된다. 또 견해가 다른 것을 굳이 일방적으로 실어놓고 "이것이 옳다!"(그건 학자들끼리 할 얘기다!) "어느 교과서는 쓰지 말라!"고 하는 건 결코 옳은 주장이 아니다. 교과서 심사는 잘 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지고, 논란에 끝이 있을 수도 없다. "국정이냐, 검정이냐?"도 문제가 아니다. "선생님! 여기는 서로 다른 얘기가 실려 있는데요?" 하고 물으면 "그래, 그건 앞으로 학자들이 해결해야 한다" 혹은 "우리가 토론할 문제다!" 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수업(학습)자료에는 교과서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지식과 정보의 바다"라는 말이 인터넷의 대명사인 세상이고 "온 세상이 교과서"라는 학자도 있는데 굳이 달랑 한 권의 교과서만 보게 하면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래서 아예 '교과서'라는 이름을 없애고 '교재'의 한 가지로 취급하는 나라가 늘어나고 있다. 교과서 제도는 아직 더 먼 길을 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