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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저 아이- "성질머리가 제 외조부 닮아서……"

by 답설재 2015. 6. 25.

 

 

 

 

 

 

 

내 외손자입니다. 걸음마 단계여서 소파에 의지해 이동하며 즐거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 아이네가 처음 마련했던 그 좁은 아파트가 생각납니다. 그나마 무리를 해서 장만한 아파트였으므로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저 아이는 그걸 알 필요도 없었고 알 수도 없었으므로 마냥 즐거운 한때였습니다.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녀석의 저 즐거움이 언제까지라도 이어지게 해주고 싶습니다.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러하므로, 우리에게는―녀석의 아빠 엄마, 외조모 외조부를 막론하고―그때라고 해서 아무 걱정거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녀석이 즐거워하던 저 순간을 바라보면 나는 언제나 행복했습니다.

 

녀석이나 녀석의 부모나 내가 이 사진을 받아서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걸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은밀한 행복'을 잃거나 잊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진을 받은 즉시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내 방에 갖다 놓았다가 퇴임을 하면서 다시 논현역 인근의 한국교과서연구재단 수석연구위원실로 가져가서 시시때때로 들여다보며 행복해 했고, 이제 그 사무실에는 그만 나가게 되었으므로 저 사진은 나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녀석은 벌써 중학교 2학년입니다.

녀석은 제 어미를 많이 괴롭혔습니다. 어미는 걸핏하면 친정의 '엄마'에게 전화해서 하소연을 합니다. "저 녀석 때문에 온 동네에 사과하러 찾아가지 않은 집이 없을 지경이에요."

 

그럴 때―그런 전화가 오거나 모녀가 마주앉아 녀석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한 번 "너는 엄마로서는 표창감"이라는 격려를 해주긴 했지만 그런 말을 자꾸 할 수도 없고, 그 대화에 끼어들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녀석의 그런 기질은 순전히 아빠(혹은 "당신")를 닮았기 때문!"이라거나 "당신의 그 못돼먹은 성품이 고스란히 저 아이에게 유전됐다!"고 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습니다.

'어디, 내가 날 닮으라고 요청해서 녀석이 나를 닮았나? 아니면, 녀석이 태어날 때 날 닮겠다고 신청서라도 제출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너나 네 에미는 왜 가만히 있었나? 절대로 네 외조부 닮지 말고 우리 두 사람 중 하나를 닮으라고 할 것이지……'

한 마디만 덧붙이면, 사실은 나는 어릴 때 남에게 사과를 해야 할 일을 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 기억나는 일이 전혀 없지만, 이런 소리를 해봤자 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와 지금이 같아요? 세상이 변했는데……"

 

 

 

 

그러던 녀석이 이번에는 아주 특이한 일을 벌였습니다. 아니, 녀석이 일을 벌였다기보다는 녀석의 담임 선생님이 그렇게 했다고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녀석에게 덜컥 학교장 명의의 '인성상'인가 뭔가를 수여했다는 것입니다.

녀석의 담임 선생님은 체육 선생님인데, 화가 나면 절대로 마음을 바꾸지 않다가도 녀석이 교무실로 찾아가면 못이긴 척 빙그레 웃으며 교실로 돌아오신다니, 왜 그 상을 주셨는지 물어보나마나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녀석이 그런 상을 받은 걸 절대로 고마워하거나 환영하지 않습니다. 녀석이 앞으로는 말썽을 일으키지 않을 리가 없고, 그러면 괜히 녀석만 곤혹스러지기 때문입니다. "너는 이놈아! 그런 상까지 받아놓고 어떻고……" 할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우선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녀석이 그 상을 받자마자 온 동네 사람들이 녀석의 어미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서 그날 저녁 녀석의 어미는 당장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자식 키우다가 이젠 칭찬을 다 받아보고 있어요."

 

 

 

 

이번에도 나는 아뭇소리 하지 않았습니다. 또 무슨 화나는 일이 있으면 상황은 돌변할 것입니다.

 

녀석은 지난 5월에 교내백일장에서 내 이야기를 써서 최우수상을 받았답니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썼는지 모르지만 녀석의 그 마음만 변함 없다면, 까짓거 제 어미와 외조모가 머리를 맞대고 "성질머리가 제 외조부 닮아서 어떻고……" 하는 소리쯤은 지금까지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니었고, 그 순간만 지나가면 다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나에게 맞대놓고 삿대질을 할 것도 아니고, 그저 표정이나 분위기만 봐도 다 짐작이 가도록 나를 지목하는 것이니 잠시 그런 분위기를 견디거나 그런 표정을 보고 눈치채지 못하는 것처럼 지내는 것쯤은 바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진짜 마음이 쓰이는 건 따로 있습니다. 음, 저 사진을 들여다볼 때마다 나는 늘 행복해지는데, 그렇게 행복한 것이 저 아이에게 미안한 것입니다.

 

그건,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이 어려운 세상에 대해 녀석을 따라다니며 내가 일일이 설명해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녀석 때문에 나는 행복한데, 녀석은 스스로 알아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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