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인형 '하나'가 밟혔습니다.
어둑어둑해서 몰랐고, 이게 뭔가 싶어서 내려다봐도 녀석은 무표정했습니다. 아픈 표시도 내지 않고 밟으려면 실컷 더 밟아보라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어두운데 왜 여기 혼자 있지?"
"굳이 물을 것 없지 않겠어? 괜히 뭘 묻고 그래?"
Ⅱ
측백나무 화분 위에 앉혔습니다. 내가 데리고 들어갈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내일이라도 찾아가겠지…….'
"외로워 보이는데?"
"천만에! 웃기지 마! 난 괜찮아! 전혀!"
Ⅲ
괜찮다고는 했지만, 이제 영영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거나 어쩌면 이승에서의 마지막 밤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일 아침, 다른 아이가 집어가거나 떡볶이를 담았던 일회용 컵, 과자봉지 같은 것들과 함께 아파트 청소 담당자의 쓰레기봉투에 들어간다면 곧 끝장일 것입니다.
주인을 찾지 못하면 다른 아이에게라도 맡겨지면 좋을 것입니다.
흔히 괜찮은 척해야 합니다. 아프다고 해봐야 별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마련입니다. '유기견' '유기인(遺棄人)'처럼…….
괜찮은 척하며 살아가야 할 일들이 자꾸 생기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유방암 환자는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즐거운 척하면서' '마음속 혼란'을 감추는 것이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공손하고 순종적인 사람에 비해 성격이 더 '괴팍했다.' 또 그런 사람이 병에 걸리면 병의 진행도 매우 빨랐다.
― 대리언 리더·데이비드 코필드『우리는 왜 아플까 Why do people get ill?』
(배성민 옮김, 동녘사이언스 2011,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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