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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책을 읽지 않으면서도 태연하게 살아가기

by 답설재 2013. 11. 27.

 

 

 

 

 

책을 읽지 않으면서도 태연하게 살아가기

 

 

 

 

 

  '사치감(奢侈感)'이라는 새 단어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책을 고를 때 '이건 사치'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그런 경우에 쓸 수 있는 정도의 단어입니다.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은, 서점에 들어서면 가격은 1~2만원인 수많은 책들이 나 좀 보라는 듯한 표정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그 중에서 거의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는 행위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사 놓은 책을 다 읽지도 않고 또 다른 책을 사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치감'만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체계적으로, 또 시각적으로 잘 전시된 책들을 살펴보고 지나가거나 그렇게 전시된 책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는 일에는 각양각색의 성격이 반영되겠지만, 서점 측에서 그 성격을 일일이 점검하고 있지는 않으니까 부끄러워하거나 스트레스를 받거나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다 읽지도 않고 또 다른 책을 구입하려면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것도 성격 나름인지 모르겠으나 돈이 들기도 하고, 그 책을 보관하는 장소가 그리 녹록하지 않기 때문인가 싶기도 합니다.

  마음을 더 찌르는 이유도 있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던 상당한 양의 책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책을 구입할 때는 사치를 하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스트레스를 좀 받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구입한 책을 다 읽지도 않고 다른 책을 구입하는 '사치'를 시작하고서도 한동안 다른 사람들은 구입한 책을 다 읽고 다른 책을 구입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지금보다 더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꼭 그렇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되었으며, 지금은 갖고 있는 책을 다 읽지는 않았다는데 대한 변명까지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우선, 책을 읽지 않고 살아가는 게 무슨 병이 아니라 아주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쁜 세상에 책을 읽는다는 것이, 더구나 하는 일 때문에 읽어야 하는 필수적인 실용 독서를 제외하면 사실상 어려운 일 아닌가 싶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일은 말하자면 개성에 따른 ―그러니까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데도 좋아서 읽는― '취미' 활동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한 것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책이란 읽고 싶을 때 읽으면 되는 것이고, 더구나 살아가다 보면 저절로,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할 때가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하는 일이 많고, 게다가 바쁘고, 이것저것 신경 쓰이는 일이 자꾸 일어나는 사람에게 "책을 읽어라!"고 하는 건 정말 어처구니없는 강요이고, 억지 주장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책이란 그냥 갖고만 있어도 좋은, 즐거워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남이 보기에도 좋은, 즐거운, 아주 '저렴한' 사치품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의 경우에는, 책을 사면 그 표지를 쓸어보고, 요리조리 만지작거리고, 냄새도 맡아보고, 표지와 등표지, 뒷표지, 날개 등을 꼼꼼히 살펴봅니다. 이러한 행위는 실제로 책을 읽는 일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잠시 그렇게 하다가 책장에 넣어두고는 그 등표지만 보고도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책을 읽지 않고 책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책도 있지 않습니까?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1

 

  이렇게 소개하면 "아니, 책을 읽지 않고도 책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단 말이야?" 하고, 이 책에 대해 놀라움과 호감을 가질까봐 좀 조심스럽긴 하지만, 이 책은 우선, ①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경우, ②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 ③ 다른 사람들이 하는 책 이야기를 귀동냥한 경우, ④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 등 비독서(非讀書)의 네 가지 경우를 든 다음, 그렇게 책을 읽지 않고도 이야기를 해야 하는 담론의 상황도 ① 사교 생활에서, ② 선생 앞에서, ③ 작가 앞에서, ④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등 네 가지로 나누어 놓고, 대처 요령에 대해서도 ① 부끄러워하지 말 것, ②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 ③ 책을 꾸며낼 것, ④ 자기 얘기를 할 것 등 네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거듭 밝히는 바이지만, 이 책을 읽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터득하고 못하고'에 대해서는 관여하기가 난처하다는 입장을 확실하게 덧붙여 두는 바입니다.

 

                                          이 블로그에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소개한 자료 바로가기

                                                                                                     ☞ http://blog.daum.net/blueletter01/7638033

 

 

 

 

  그런 변명, 합리화 요령까지 다 마련해 두어서인지 '읽지 않은 책'은 자꾸 늘어납니다. 책을 사들이는 속도가 읽어내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입니다. 아예 책을 집어들지도 못한 어제도 벌써 세 권이 늘어났습니다.

 

  오죽하면, 그렇게 쌓아놓은 서가를 바라보다가 '이 책부터!' '시간 나면 이 책은 꼭!' 하고 앞으로 빼어놓은 책들만 해도 자꾸 늘어나서 '읽어야 할 책 중 특히 읽어야 할 책'이라는 무슨 서열 혹은 '별도 목록'을 마련하고 있는 듯한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 '죽기 전에 읽고 싶은 책 중에서 꼭 읽어야 할 책'?

 

  그러나 그 '목록'은 스트레스만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읽지는 못했지만, 심지어 '내게도 이런 좋은 책이 있다니!' 싶은 자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쌓이는 책이 요긴한 경우는 또 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읽을 책을 고르는 흥분? 기대? 그 흥분, 그 기대는 이렇게 '물러나서' 지내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소중하고 즐거운 순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열차를 타고 가면서, 그 호텔에서, 다시 열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읽을 책을 고르는 일, 그 일이야말로 저렇게 책을 쌓아놓고 사는 내가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싶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행? 그 기회가 흔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집에서 사무실로, 사무실에서 집으로 오고가는, 그 일상적인 이동(移動)을 '여행'으로 간주하기로 했습니다. 그 여행은, 편도 두 차례씩 전철을 타는 시간이고, 합해야 한 시간 이내지만, 잡념을 잊고 책을 펼칠 수 있는 '빛나는' 시간이어서 책을 펼친 나를 힐끔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얼른 다른 전동차로 옮겨 타기도 할 만큼 소중한 시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책을 쌓아두고 지내는 입장이, 디지털 예찬론자가 책을 바라보는 입장하고는 전혀 다른 것 같아서 씁쓸하기도 합니다.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현대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문학평론가 앙트완 콩파뇽 교수는, 그의 아이폰에 프루스트의 <스완의 집 쪽으로>의 1913년 그라세 출판사 판본과 1919년 갈리마르 판본이 저장되어 있고, 태블릿 PC 덕분에 다시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던 두꺼운 러시아·영국·미국 소설들을 다시 읽게 됐다고 말하는 디지털 예찬론자라고 합니다.2

 

  그는 지난 6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한 인터뷰에서 "e교과서로 수업하고 하이퍼 텍스트 덕분에 참고자료를 동시에 보면서 공부하는 세대의 등장에 대해 변화는 분명하지만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확정된 답은 아직 없다"는 유보적 입장을 보이긴 했지만, "어떤 책을 가져가야 할지 고민하지 않고 여행을 갈 수 있다는 건 정말 유쾌한 일"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3

 

 

 

 

  어떤 관점이 옳다느니 뭐 어떻다느니 할 것까지는 없을 것입니다. '디지털'을 들고나와 이야기한다면 종이책 이야기를 하는 입장은 어차피 좀 뒤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예 게임이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방법이면 그만일 것입니다. 굳이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방법, 좋아하는 방법을 따라간다는 것이 우스운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어느 날, 나는 다시 이 사무실에도 나오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어느 날, 나는 이 세상의 책을 그만 읽게 될 것입니다. 그날 내가 바라보며 '저 책을 한번 읽어봤더라면……' 생각하게 될 책은 어떤 것일지…… 이승에서의 독서를 뒤돌아보면서……

 

  아주 먼 길을 떠나기 전에 생각나게 될 책……

  고독?

  침묵?

  죽음과의 만남?(가령 종교학자 정진홍 교수의 '나직나직한 음성' 같은 책?)

  명상록?

  경전(經典)?(이렇게 허접하게 살아온 것을 한탄하거나 혹은 감사해 하고 송구스러워 하면서?)

 

 

 

 

'취영루' 3층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

 

 

 

 

 

 

 

 

  1. 피에르 바야르의 책(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2008년 1판1쇄). 이 브로그의 http://blog.daum.net/blueletter01/7638033에서 소개한 책. [본문으로]
  2. 경향신문, 2013.6.9, '디지털 독서, 종이책 세대에게 더 많은 혜택 줄 것-롤랑 바르트를 잇는 문학지성...프랑스 문학평론가 앙트완 콩파뇽'. [본문으로]
  3. 위의 기사에서.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