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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이 삶의 풍요에 대한 감사

by 답설재 2013. 6. 23.

나는 자주 낮잠을 잔다. 낮잠을 좋아하지만 깨는 순간도 좋아한다. 잠이 깨면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들을 볼 수 있는 장소에서 자주 살았다. 침대에 누우면 창문을 통해 하늘 아래 나무들이 보인다. 하늘빛을 배경으로 초록 잎사귀들을 볼 때면, 나는 감사하고 그리운 감정이 일어난다. 뭔가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죽을 때 그것들이 그리울 거라고 종종 혼잣말을 한다. 내가 무엇을 그리워할까? 색 그 자체, 아니면 그 색을 보는 것? 물론 죽으면 그러한 것들을 그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략)… 침대에 누워 하늘색과 초록색을 보는 것은 내 프로젝트는 아니다. 그것은 내가 참여하는 것의 일부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을 한 이유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Death』에서 저자 토드 메이는,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들은 대부분 지속적인 참여(프로젝트)지만, 삶의 풍요로움과 다양함을 유지하려면 저렇게 한가로이 "침대에 누워 하늘색과 초록색을 보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썼다(토드 메이 지음, 서동춘 옮김, 『죽음이란 무엇인가 Death』(파이카, 2013), 55~56쪽).

 

 

 

이승을 떠나는 길에서 만약, 저승사자가 내게 "딱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꼭 요청하고 싶은 모습들이 몇 가지 있다.

 

아파트 창문 너머로, 저 아랫마을에서 올라와 정문(正門)에 이르는 길, 정문을 지나 우리 동(棟)으로 들어서는 길을 내다보고 싶다. 출퇴근 시간에는 자동차 행렬이 이어지고, 아파트 앞으로는 간간히 버스도 오르내린다. 게다가 오솔길처럼 구불거리고 있어서 정감을 느끼게 한다.

한 번밖에 더 볼 수 없을 때, 그렇게 허락되었을 때 내다보면 가슴이 덜 답답할 것 같다.

많이 아파서 병원에 다녀온 후에 얼른 이사를 하자고 아내에게 졸랐는데, 이 길은 그렇게 조른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누가 오는지 보려는 것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일요일 아침 나절, 잠깐 우리 집 거실 깊숙히 비쳐드는 햇살도 한 번 더 보고 싶을 것이다. 부천에서 살 때부터였다. 그 시절은 여러 가지로 여유가 없었던 때이기도 하고, 솔직히 말하면 내게 생명이 부여된데 대한 책무성 때문에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간이 흔했다.

 

예전에 시골에 살 때, 지금의 나처럼 심장병에 걸려서 늘 아프긴 했어도 아직 세상을 떠나지 않은 어머니가 마흔 언저리인데도 흡사 할머니 같은 행색으로 살아 있을 때, 겨울방학 동안, 사랑방에 앉아서 그 어머니가 해주는 칼국수 같은 걸로 점심을 먹으며 가령 최인호의 『겨울 나그네』 『영자의 전성 시대』,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혹은 『수호지』 같은 걸 읽고 있으면, 석양이 그 방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서 온 방안을 환히 비추어줄 때의 그 아름다웠던 순간을 잊을 수는 없지만, 이제는 도저히 그걸 바랄 수는 없으므로 아파트 거실을 찾아주는 아침나절의 그 햇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그럴 때 들을 수 있는 것은, 구태여 언제 한번 정신차리고 듣고 싶어 사 둔 음악이 아니어도 고마울 것이다. 가령 라디오 방송의 변함없는 시그널 음악조차도 좋다. 변함없어서 좋고 들을 수 있어서도 좋다.

 

 

 

 

 

밖에 나가봐도 좋다고 허락되면, 서점에 가보고 싶다.

새로 나온 책, 얼마나 멋진 제목을 달고 나온 책들이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많은 시간이 허락되었는데도 읽지 못한 책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지, 그런 것도 살펴보고 싶고, 책을 읽고 있는 아름다운 저 젊은이들도 잠깐만 더 바라보고 싶다.

 

그들에게, 지금 그렇게 정신없이 읽고 있는 그 책을 내가 좀 사주면 안되겠는지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연이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교실 저 뒷쪽에서, 그 먼 곳에서도 선생님의 설명을 잘 듣고 있거나, 고개를 숙이고 책을 들여다보는 아이들의 모습도 참 신비로웠다. 지금도 그 아이들은 그렇게 앉아 있는지 늘 궁금하다.

 

책이란 아무렇게나 두어도 아름답다.

그리고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아이들밖에 없다. 아이들은 어디 있어도, 아무렇게나 있어도, 아름답다.

그 아이들을 더 바라보겠다는 요청은 아무래도 사치일 것이다.

 

 

 

아, 인사를 해야 할 대상이 더 있다.

자다가 깨었을 때, 내가 잠들어 있었는데도 내 침대 머리맡까지 찾아와 준 저 달빛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날 밤, 저 달빛이 보이지 않으면 얼마나 섭섭할지 그런 상황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 인사를 해야 할 대상에는 사람도 몇 명 있다. 그들은 필요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사람, 내 삶을 풍요롭거나 다양하게 해준 사람, 그러나 그런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특별한 인사를 할 기회를 마련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하기야 그런 인사를 하면 "지금 떠나게 되었느냐?"고 물을 것이고, 그러면 좀 난처할 것 같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