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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브리기테 슈바이거 『아름다운 불빛』

by 답설재 2013. 4. 2.

브리기테 슈바이거 『아름다운 불빛』

차봉희 옮김, 문매미, 2011

 

 

 

 

 

 

"작가 크리스티네의 남성 편력(遍歷)", 혹은 "크리스티네의 남자들", 좀 그럴 듯하게 "크리스티네의 남성성(男性性) 탐구"……,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이, 그것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대상이 한둘이 아니어서 그렇게 표현해 버리면 쉽겠지만 그건 도저히 말이 아닙니다.

 

"주인공 크리스티네의 삶의 역정(歷程)"? 그게 좋겠는데, 이번에는 너무 평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순하고 아름다운 작가 크리스티네 라이텐마이어가 행복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해보겠습니다. 좀 유치하지만 나름대로는 애써 마련한 제목입니다.

 

 

 

크리스티네는 처음에 남자를 이렇게 만났습니다.

 

라파엘이 배 안에서 그녀를 겁탈했다. "배에서 살아나갈 생각 마." "얼굴에서 손 치워! 안 그러면 머리통을 박살 내버릴 줄 알아!" "얼굴에서 손 떼라고 내가 말했잖아! 무릎을 꿇어, …(중략)… 그 후로 그녀는 유럽의 미래 따위에는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206).

 

그곳에서 그녀는 미술 공부를 했다. 라파엘, 그 스페인남자는 그가 숨 쉬는 공기보다도 훨씬 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했고, 그는 그녀의 순결을 빼앗았고, 그녀를 미술학교에 데려다 주었다. 그들은 결혼했다. 허지만 그녀가 스페인어로 통역해 들려준 판타지들 때문에 라파엘은 그녀를 외국인, 창녀, 화냥년이라 불렀다. 라파엘이 그녀를 쫓아 보내자 그녀의 부모는 그녀와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 자신은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14).

 

 

 

이제 크리스티네가 만난 남성들을 하나 하나 소개할 수 있는데, 모두들 크리스티네와 생생하고 특이한 관계를 형성했지만,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생각해 보면 단지 각각 다른 남성성을 지닌 인물들일 뿐입니다.

 

저렇게 해놓고도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스페인남편 라파엘.

외면할 수 없는 이런저런 일로 끈질긴 관계를 맺고는 남들에게는 그 관계를 감추어 두는, 예순을 넘긴 작가 발터 슬라비크.

"나와 함께 사는 걸 상상해 볼 수 있겠어?" 해 놓고는, "너와 함께 살면서 나 자신에 대해 뭔가 어떤 것을 좀 체험해보고 싶었어." 하고 돌아선 희곡 작가 안톤 라이틀.

섬세하고, 젊고, 헌신적인 사랑을 느끼게 했지만, 유대인 학살 사건으로 죄의식이 되살아나게 한 독일계 유대인 다니엘.

좋다고 해 놓고는 그녀가 원할수록 뒤로 물러나는 TV 촬영기사 뒤름러.

신뢰할 만한 인물인 척하면서도 공동작업을 한 대본에 자신의 이름만 올린 TV 방송 시나리오 작가 추키 타보르스키.

"회오리바람처럼 그녀를 향해 돌진"해 와 놓고는, 그녀가 애원할 때마다 언제나 돌아서 버리는 화가 볼퍼 에거.

"악수 한 번"으로 그녀의 사랑을 차지하고, 벽면을 온통 크리스티네의 사진으로 채워 놓지만 부인과 헤어지지는 않는 저널리스트 유르겐.

그 외에도, 성 관계가 없이도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인물로, 그녀처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영화인 헬무트도 있고, 그녀를 작가로 탄생시킨 출판계와 문학계의 거장 알베르토니, 또 저명한 저널리스트 이그나츠 후터도 등장합니다.

 

 

 

대상들이 모두 문화계 인사들인 건 크리스티네가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서 작가가 되었습니다. "오직 그 스페인남자 녀석이 그녀를 목 졸라 죽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녀는 스스로를 유명인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남자 저 남자…… 뭐 그런 여자가 있나?' 싶다면 속 모르는 말입니다. 눈물겹습니다. 한 부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는 그녀가 오히려 짠하게 다가옵니다.

 

예순을 넘겨 크리스티네보다 마흔 살이나 위인 작가 발터 슬라비크와의 관계만 엿보겠습니다. 우선 소설의 첫머리에서 그들이 처음 만나는 장면과 크리스티네가 발터와 함께 지내고 싶어하는 장면입니다.

 

크리스티네 라이텐마이어가 첫 단편소설을 발표했을 때 그녀는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녀가 이후 인사차 찾아간 저널리스트는 최신 유행하는 의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아주 예쁘고 실용적인 종이옷이란 게 있는데 더러워지면 버리면 그만이라고 했다. 이 편집실에 있는 그 옷을 그녀가 꼭 입어 봐야 한다면서, 그는 물론 문밖으로 나가 있겠다고, 종이옷이 그녀에게 썩 잘 어울릴 거라고 장담했다.

…(중략)… 크리스티네는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종이옷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무릎과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7).

 

그녀는 이른 아침에 눈을 뜨면 그녀가 바라볼 수 있는 아이가 하나 있었으면 했다. 아니면 하다못해 뭔가 할 일, 무언가 유익하고 필요한 어떤 다른 일거리라도. 그녀는 깜깜한 밤이 아니라 환하게 밝아오는 새벽에 발터와 함께 침대에서 잠을 깰 수 있었으면 했다. 새벽 3시라는 밤중에 그녀를 깨워, 일어나요, 택시 불러줄게, 하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대신에(189~190).

 

 

 

그렇지만 남자들은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사람에 따라, 때에 따라 그 수작은 다르지만……

 

그는 아침 절에는 혼자 있고 싶어 했다. "난 잠을 깬 직후엔 기분이 별로야. 난 그냥 혼자 뚜벅뚜벅 돌아다니지. 그때 누가 말을 거는 건 정말 딱 질색이야. 내가 필요로 하는 건, 진한 커피 한 잔이야."

"내가 커피 준비해 줄게요."

"아냐, 제발, 그건 말도 안 돼. 아침에 나 혼자 있어야만 해."

긴 밤의 잠에서 함께 깨어나는 것, 그건 어떻든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크리스티네는 생각했다, 함께 잠드는 것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190)

 

그렇게, 사랑하는 남자를 가지려고 애쓰는 크리스티네를 보면 가련하기 짝이 없습니다. 맨처음 발터의 사무실에서 종이옷을 입어보는 그녀는 '눈송이', 아니라면 적어도 '안개꽃 같은 소녀'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따지고보면 '눈송이'나 '안개꽃'이 아닌 여성이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하는 것이지만…….

 

남자들은 중요했고, 그녀는 한 남자를 소유하고 싶었으며, 사랑을 하고 싶었다, 마치 이 세상에 그 이외의 어떤 다른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그렇게. 그녀는, 여러 차례 주워 삼킨 이런저런 수많은 알약들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그녀는 생각했다: 한 남자와 함께 하는 삶만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193).

 

 

 

안타깝게도 크리스티네가 아직 사랑하는 남자를 가지지 못한 채 이 소설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불빛, 그것은 집안에 있는 불빛, 마음 편안한 쾌적함이며, 그리고 그것은 정신의 빛이 아니고, 불꽃이 튀는 반짝거리는 빛도 아니고, 얼비치는 섬광도, 찬란하게 번쩍거리면 눈부시게 하는 빛도, 반짝반짝 발하는 빛도 아니다. 이런 것들이 아니라 그냥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것.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저 먼 곳에 사는 한 소녀에게 보낸 카프카의 편지들을. …(중략)… 크리스티네가 스스로 원했던 것은 등유 램프였다. 그런 편지들은 따뜻한 불빛을 소유한 경우에만 읽어야 할 것이다. 자그마한 시골 방, 소파 하나, 시골농가 풍의 책상 하나, 그 가구들로 그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어떤 것을 창의적으로 만들어내려 시도했다: 바로 안온함을. …(중략)… 크리스티네는 자신의 삶에서 각 시기들을 남자들 이름을 따라 명명했다. 그녀의 길을 교차했던 남자들, 비록 그녀가 그 어떤 길도 가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길 가장자리에 서 있었고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기다렸다. 하나의 손길이라도 다가오면, 말하리라: 나를 함께 데려가요!(287~288).

 

더구나 이 소설을 쓴 작가 브리기테 슈바이거는 우울증과 자살 충동, 환청 등의 문제로 오랫동안 심리치료를 받으며서도 작품 활동을 지속하다가 2010년 7월 27일, 빈 근처의 도나우 강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 죽음을 생각하면, 이 소설가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소설 속의 작가 크리스티네가 저 여러 명의 남성들에게서 편안하고 쾌적한 불빛을 찾지 못한 것이 안타깝고 애잔하기만 합니다.

 

 

 

이 소설은 『물의 희롱』이라는 소설에 소개된 걸 보고 읽게 되었습니다. 그 소설 『물의 희롱』은 이렇게 시작됩니다(김채원 중편소설, 『물의 희롱-무와의 입맞춤』현대문학 2012년 1월호, 119쪽.)

 

'우리가 찾고 있는 인생에의 안온함은 남성과의 사랑과 성으로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이런 상태에서 어떤 여자가 파괴되지 않고 제대로 건강한 생물체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오늘 받은 K씨의 편지 한 대목입니다.

 

실로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남성과의 사랑과 성으로써는 인생에의 안온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더구나 사랑과 성을 통해 인생에의 안온함을 추구하려는 과정의 사례를 보여주면서 그런 상태에서 어떤 여자가 파괴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반문……

그렇기로 말하면, 그렇다면, 그런 경우에 남성은 파괴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일까요?

저는, 그렇다면, 우리들 인간은 이성과의 사랑과 성으로써 인생에의 안온함을 추구할 수 없는가, 그렇다고 해도 실제의 삶에서 그 시도를 그만둘 사람도 별로 없긴 하겠지만, 만약 그런 노력을 기울이면, 결국 그 인생은 파괴되고 마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해봐야 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 『아름다운 불빛』은 그 답을 제시하고 있긴 하지만, 그 답을 찾는 것은 독자들이 할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소설 『물의 희롱』 첫머리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사랑과 성을 통해서는 결코 안온함을 찾을 수 없으며 인생에서 그런 것을 추구하는 한 결국 파괴되고 말 것이라는, 다시 말해 남성의 사랑을 통한 인생에의 안온함은 없는 것이라고 보고 그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 한 예로 K씨는 독일 여류작가 브리기테 슈바이거와 그녀의 작품 『아름다운 불빛』을 소개하였습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