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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학교라는 곳에 대하여

by 답설재 2013. 3. 15.

책을 읽다가 학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호기심이 발동하기 마련입니다. 적극적으로 학교를 풍자하고 비난하는 내용인 것을 확인하는 순간, 옆에 있는 사람이 교육에는 영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러니까 그게 누구라 하더라도 그걸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이것 좀 봐! 여기도 이렇게 되어 있잖아! 학교는 형편없는 곳이라잖아!"

 

다른 일을 한 사람, 그런 일을 하다가 퇴직한 사람들도 그럴까요?

"이것 좀 봐! 우린 이렇게 엉터리야!"

 

 

 

'정답만 맞히면 되는 인생'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은희경의 단편소설,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그때까지의 나의 인생은 단순하고 명확했다. 목표는 명문 외국어고등학교를 거쳐 일류 대학에 가는 것이었고 그런 다음에는 고소득이 보장되는 직업을 갖고 가정을 꾸리도록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 나는 주어진 문제에 열심히 정답만 맞히면 되었다. 전혀 복잡하지 않았다. 나의 유년은 유복하고 화목해 보이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었으며 그 시스템 안에서 엄마와 나는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나는 학교와 학원에 다니느라 늘 바빴고 엄마는 엄마대로 시간을 보냈다.1

 

"나는 주어진 문제에 열심히 정답만 맞추면 되었다. 전혀 복잡하지 않았다."

작가는 우리의 아픈 현실을 너무나 간결하게 보여줍니다. 주어진 문제에 열심히 정답만 맞추면 되는 인생이, 전혀 복잡하지 않은 그 인생이, 사실은 얼마나 복잡한 인생인지,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고발도 있습니다. 이건 우리나라 얘기는 아니지만, 거의 일치한다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브리기테 슈바이거 소설, 『아름다운 불빛』)

 

그리스에 있다는 게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았다. 더구나 현재의 그리스엔 신들도, 과거의 문명들도 다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아크로폴리스를 돌아보고 왔다. 역사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건축물만 구경하고, 살랑거리며 스쳐 가는 가벼운 산들바람만 느낄 수 있다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낮의 뙤약볕에도 그런대로 바람 덕분에 그곳 언덕 위에 머무르며 걷는 게 그나마 견딜 만했고, 산책조차도 즐길 수 있었다. 과거 따위는 생각할 필요도 없고, 어떻든 그 과거에 관해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정말 모든 게 다 그랬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학교에서 유일한 관심거리로 여기는 철학자들이나 군주들 말고도 수천, 수만의 개인들이 살았을 터인데, 그들에 관해서 우리는 그들이 싸움터에서 쓰러졌다거나 노예가 되어 팔려가 매매되고 희생되고 학살당했다는 것만을 계속 들을 뿐이었다.

외스터라이히의 젊은 세대들이 최근의 과거사를 규명하고 정리해야 한다는 요구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들은 나치 시절에도, 민주정치의 기초를 세운 페리클레스의 첫 번째 민주국가 시대에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거기에 없었다. 그리고 희생과 학살, 그것이 하지만 어떻든 세계사의 흐름이 아니었던가. 역사라는 것이 전쟁 이외의 어떤 다른 것도 아닌 오직 그것만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왜 히틀러가 전쟁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 전쟁에서 저 전쟁에 이르는 사이의 평화협정들.2

 

 

 

그리스에 있으면서도, 유적이라면 가장 먼저 들어야 할 그 나라를 돌아보면서도 차라리 역사를 모르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육은 왜 이런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게 '역사'라면 과거 따위는 생각할 필요도 없지만, 학교에서 배운 것이 정말인지도 의심스럽다고 토로합니다. 학교에서 역사 시간에 가르치는 유일한 관심거리는 철학자나 군주들이었답니다. 그렇게 등장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쓰러지거나 노예가 되어 매매되고 희생·학살당한 신세들이었을 뿐이었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걸 부인할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 역사책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어떤 이는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든가 뭐라든가 하는 책을 냈겠습니까. 지금 서점에 가면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하면 나는 또 "매국노"라고 손가락질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역사가 굳이 '전쟁'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라면, 히틀러가 등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역설적인 이야기는 되풀이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위의 소설에서 작가는, '학교에서 공부를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삶이란 도대체가 학교입학 첫날과는 달리 무엇이었지, 학교교육의 그 시작이란 것 말이다. 그녀가 배웠던 모든 것을 그녀는 학교를 위해 배웠다. 그 후 나중엔 삶을 보다 깊이 있게 배워보고자 했고, 그걸 학교에다 보여주기 위해서.3

 

모든 것을 '학교를 위해' 배웠답니다. 삶에 대해서는 나중에 새로 깊이 있게 배워서 그걸 학교에 보여주려고 했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저 분노를 모른 체합니다. 그냥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 뿐입니다.

 

 

 

몇 마디 덧붙여봐야 무용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먼저, 대부분 공감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뜻이고, 다음으로는 이야기해봤자 쓸데없는 짓 아니겠느냐는 뜻입니다.

 

학교는 더 이상 '가르치는 곳'이어서는 안됩니다. 뭘 가르친다는 것입니까? 그런 기능은 이미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학교는 '배우게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육자들은 학생들이 배우는 것을 도와주면 그만이어야 합니다.

늦었지만 얼른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초조감이 날이 갈수록 더한데,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교육방법을 고수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육에 관한 한, 아니 학교교육에 관한 한, 곳곳에서 불협화음이 들리고, "이게 왜 이런가!" 통탄하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이러한 현상을 진단하고 고쳐 보려는 시도는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은 이런 설명조차 필요없는 얘기니까 따라서 더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만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요즘 신문에는 한국에는 "욱!" 하는 사람이 많고, 학교에는 "욱!" 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그건 정확한 진단입니다. 다만 학교는 그렇게 "욱!" 하는 학생들을 잘 보살펴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 먼저 그 일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학교 아니면 그렇게 할 곳이 없기 때문이며, 이 시대로는 교육(학교)이 마지막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좀 은유적으로 이야기하면 학교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역사도 없고 학교야말로 언제 어디서나 평화로운 곳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욱!" 하는 아이들을 보살펴 주지 않는, 그 일을 외면하는 학교는 학교도 아니지 않을까, 교습소와 뭐가 다를까 싶습니다.

 

결코 선생님들을 원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다만! 선생님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곳으로 학교를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선생님들께서 그런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선생님들은 사실은 교원양성대학에서 그걸 다 배우고 오셨기 때문인데 학교에 나오면 정답을 맞추는 훈련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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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희경,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단편소설, 『현대문학』 2012년 11월호, 125쪽) 중에서.
2. 브리기테 슈바이거 소설/차봉희 옮김, 『아름다운 불빛』(문매미, 2011), 55~56쪽.
3. 위의 책,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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