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
낮에 백화점에 다녀왔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니까, 그 일을 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거의 매일 아침 아이들 일기장 검사하던 생각이 납니다. "오늘은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아침 먹고 학교에 다녀왔습니다. …(중략)… 저녁을 먹고 일기를 쓰고 누워잤습니다."
종일 한 일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아!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가는 길에 아내가 안과에 갔었고, 아내를 내려준 나는 그동안 자주 가는 그 마트 주차장에 차를 대고 기다렸습니다. 마트와 안과가 있는 건물은 큰길을 사이에 두고, 그러니까 서로 길 건너에 있습니다.
진찰을 받은 아내는 그 병원에서 나를 부르지 않고, 길을 건너서 내가 있는 그 주차장의 출구에서 나를 기다렸습니다. 사람이 차를 찾아온 것입니다. 아내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차를 갖고 오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백화점으로 가는 길에 "단 한 번도 그렇게 하는 걸 못 봤다"고 짜증을 냈지만, 아내는 오늘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엉뚱한 얘기를 했습니다. 병원이 있는 건물로 들어가려다가 누가 불러서 돌아봤더니 며늘아기와 손녀가 차창을 열고 불러서 간단한 인사만 나누었다는 얘기입니다.
나는 언제나 별것 아닌 걸로 짜증을 냅니다. 지금 생각하니까 오늘도 그렇습니다. 왜 지금까지도 그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내는 피곤한지 텔레비전이고 뭐고 초저녁부터 잠이 들었습니다. 백화점에만 가면 많이 피곤해집니다. 나는 빵을 워낙 좋아하니까 그걸로 저녁을 대신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녁이어서 커피를 마시지 못하니까 그렇게 좋지는 않았습니다.
♣
거실에서 혼자 빵을 먹었고, 텔레비전을 좀 보다가 책도 좀 보다가 했습니다. 그래도 여덟 시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집에서, 애완견 짖는 소리가 들려오다가 이내 조용해지자, 시계와 냉장고 소리만 들립니다.
세상이 조용합니다. 다들 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적막을 좋아하면서도 언제나 '참으로 기가 막히는구나……' 싶어집니다.
1200가구나 된다는 이 아파트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
돌연 문자메시지 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 적막 속에서는 그것은 신기한 소리입니다.
──주문하신 도서(아이처럼 행복하라)를 보관중입니다. 강남점 문학팀
♣
'아, 내가 이 책을 주문했었지. 세상에 나간 길에.'
'겨우 어제였는데 옛날 일 같고, 다른 세상의 일 같네?'
이런 느낌도 듭니다.
'내가 그 세상으로 돌아가서 이 책을 찾기나 할 수 있을는지……'
'그나저나 그 서점에서는 지금 이 시각에도 문을 열어 영업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곳에는 이 저녁에도 사람들이 오가고, 여느 때처럼 그런가?'
메시지가 오는 걸로 봐서는 그게 분명한 일입니다. 메시지고 뭐고 그냥 생각해도 그건 상식입니다. 그런데도 어째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이 저녁에도 그 거리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분주하고, 그렇다? 그렇다는 건 그냥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느낌입니다.
♣
생각해보면 오늘 나는 아내와의 몇 마디 대화 말고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백화점에서 상인들과 몇 마디 나누었는가? 그렇다고 해도 그걸 대화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게 맞습니까, 고객님?"
"예."
"뭘 드릴까요, 고객님?"
"매운 쌀국수 하나, 순한 쌀국수 하나 주세요."
그게 무슨 대화이겠습니까.
우리가 사정이 변해서 혼자 남아 있게 된다면, 늘 이런 날이 될 것입니다.
적막……
결코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태어나 자란 곳도 이만큼 적막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눈이 많이 내리면 보름쯤 꼼짝 않고 있어도 괜찮았고, 비가 오려면 몇십 리 밖 추풍령을 넘는 기차 소리나 들려오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설이 지난 주일의 토요일 저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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