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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노인암살단

by 답설재 2012. 12. 30.

 

가령 아침나절의 상봉역에 가보면, 아무래도 늙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등산복'(아웃도어룩?)을 입고 모여 있습니다. 경춘선 열차가 들어오면 우루루 올라가 자리를 잡기 때문에 이후의 역에서 타는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서 가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이제 먹고살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게 된 것이 사실이구나.'

'그렇긴 하지만 아직은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나라에서는 이런 걸 알고 있나?'

'이런 현상을 그냥두어도 괜찮은 걸까?'

 

 

 

50대는 노인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겠지요? 그럼 60대는 어떻습니까?

60대도 요즘은 아직 노인축에 들지 못한다는 말은 '정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젊은이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응, 그래. 저 부류는 아직 우리와 같은 세대라고 할 수 있지."

 

나이든 세대는, 큰 잘못이 없다면 당연히 대접을 받고 살아야 한다는 '고루한' 생각 때문에 '믿거나 말거나'라고 하고 싶긴 하지만, 그 60대의 '아주머니'들이 가령 3, 4, 50대 아주머니들과 함께 어울어져 지내려면 갖은 아첨과 함께 식당 같은 데서 돈을 낼 필요가 있을 때는 눈치 살피지 말고 선뜻 낼 수 있어야 "왕언니" 호칭을 받을 수 있다는 건 거의 일반화된 상식이랍니다.

 

하기야 그런 일 아니고 어디에 나이든 사람이 필요한 세상입니까?

마늘을 까야 할 일이 있다면 인터넷에 들어가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삶의 지혜? 그런 건 굳이 노인들에게 있지 않다는 걸 설명할 필요조차 없게 된 것입니다. 마늘? 이미 까놓은 것을 구입하기도 하지만, 어느 대형 마켓에서는 "손가락만 까닥하면 집으로 다 갖다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삶의 지혜 따위는, 글자가 없었던 아득한 옛날에, 혹은 기껏해야 글자와 책만 존재하고, 인터넷은 없었던 시절에나 노인들이 향유할 수 있었던, 그러나 이제는 별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고 해도 괜찮은 것 아닌가 싶어집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있습니다. 어정쩡한 나이의 여성 노인들은 갖난애를 돌보는 일에는 아주 제격인 모양입니다. 교육적으로 그렇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고, 경제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제가 아는 여성들 중에도 그렇게 활용되는 경우를 쉽게 들 수 있습니다. 그나마 대접을 받고 살아간다고 해도 좋을지, 아니면 "아이 보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은 없다"는 그 말을 들어서 고생이 많다고 해야 좋을지는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 도대체 남자 노인들은 어디서 뭘 해야 합니까? 어떻게 처신해야 적당합니까?

 

그 남자 노인들의 세계는 '때로는' '살벌'합니다. '때로는'이라고 해두었지만, '살벌하다'는 건 자신있게 전할 수 있습니다. 당장 지하철역 엘리베이터를 타보면 압니다. 건드리면 터질 듯한 그 분위기, 말하자면 다 함께 늙어가는 자신들끼리도 단 한 마디 간섭을 하거나, 얼른 타려고 하다가 몸이 부딪히거나, 만원인데도 타려고 하거나, 가만 두어도 작동되는 그 승강기의 on OFF 스위치를 건드리거나 하면 금방 욕지거리가 터져 나옵니다.

 

'이게 노인들인가?'

'이렇게 해서 살아갈 수가 있겠나?'

 

요즘은 전철 안에서의 자리다툼은 좀 줄어든 것 같습니다. 이미 80대쯤 되면 아무 말이 없게 되지만, 딱 세 자리인 그 '경로석'에서(심지어 노인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그렇게 정해놓은 것 아닌가 싶은 그 자리를 두고) 6, 70대의 노인들이 "너도 노인축에 드느냐?"는 빈축으로 쌈박질을 하다가 더러는 주민등록증을 꺼내는 사례로써 건강관리를 잘해 젊은이처럼 보이는 상노인(上老人)도 있다는 걸 실감하고 무참해하던 것도 옛일이 되었습니다.

그 '경로석'이 경로석이 아니라 장애인, 유아를 동반한 부녀자, 더구나 임신은 했지만 아직 표가 잘 나지 않은 여성들도 배려를 해야 하는 자리로 바뀌자, 이제 노인들은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형편이 된 것입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해야 할까요? '노인암살단' 얘기 말입니다.

 

서울대 등의 강사로 국사를 가르쳤고, 서울특별시문화재위원회 위원이며, 역사·인문학 분야에서 영향력 1위(코리안 트위터 집계)를 자랑하는 파워 트리터리안이기도 한 어느 학자가 "경제학자의 예측"이라며 그런 글을 올렸답니다.

어느 신문(2012.12.25) 기사에서 인용된 부분만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030년대에는 노인암살단이 생길지도 모른다."

"사회적 약자를 짐이자 성장의 장애물로 보는 관점이 바뀌지 않는다면 노인이야말로 사회적 비용을 늘리는 잉여(剩餘) 인간이 아닌가."

"나이가 들수록 자기중심적이고 사회정의에 대한 인식이 박약해진다. 노인이 될 사람들이 정의감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것도 고령화 사회에 대비하는 길이다."

"세대별로 보자면 양극화가 가장 심하면서도 상호 교류가 없는 세대가 노인 세대"

"부자 노인이 가난한 노인을 자발적으로 돕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들이 집중적으로 교육받은 40~60년대에는 애국심 교육만 있었을 뿐 사회정의 교육은 없었다."

"노안이 오면 글을 끝까지 읽기 귀찮아 신문도 헤드라인만 본다."

 

 

 

글쎄요, 곧 70대로 들어서게 된 저 같은 입장에서는 그렇다, 그렇지 않다고 하기가 난처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네티즌들이 나서서 "이젠 부모 자식 간 이간질이냐"고도 하고, "이분은 깔끔하게 정리해주시네요. 300% 공감"이라고도 했다니까 조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로서는 다음과 같은 코멘트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그런 견해를 밝힌 그 학자는 주변의 상황에서 그런 징조, 즉 이러다가는 노인이 암살될 것 같다는 느낌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선뜻 그런 견해를 밝히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렇든 그렇지 않든 무슨 조치(?)는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조치는 주로 어떤 방법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겠습니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교육적? …………

 

  • 여야가 모여 무슨 특별위원회를 만든다.

  • 자녀가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의식이 거의 사라져 가고 있으므로 노인들을 안전하게 먹여 살리는 사회적 기업 같은 걸 구상한다.

  • 앞으로는 노인이 더욱 늘어날 것이므로, 가령 지방자치단체별로 사회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특별한 방법을 강구한다.

  • "노인을 공경하자" "부모를 봉양하자"와 같은 교육은 이미 물 건너간 일이므로 교육목표와 내용은 물론 교육방법과 교육대상에 대해 폭넓은 논의를 거쳐 생애 교육적 방법을 강구한다.

  • 노인문제는 노인들 자신에 관한 문제일 뿐이므로 일찍 일어나 동네 골목길 걷기도 열심히 하고 다이어트 같은 것도 잘 해서 주변 사람들 신세를 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책임지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 …………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많지만, 어느 정도여야 하니까 한 가지만 덧붙입니다. 저 자신은 노인이 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노인은 별도로 정해진 사람들인 줄 알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건 정말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살다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줄을 선다면 노인들의 줄에는 가까이 가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줄에는 왜?'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나서서 저를 가리키며 말하겠지요. "정신 좀 차리라!"고.

     

    이런 생각을 해보자니 참 한심하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냥 듣고 넘어가도 좋을 일을 가지고 혼자서 진도(進度)를 나가봤자 뭐 하나 싶은 것입니다.

     

     

 

제가 자주 읽고 있는 알베르 까뮈의 글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해마다 이 해변에는 새로 수확되는 꽃피는 처녀들이 있다. 분명, 그 처녀들에게는 한 철밖에 없다. 그 다음 해에는 다른 정다운 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지난해 여름에만 하더라도 그들은 봉오리처럼 딱딱한 몸을 가진 어린 소녀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오전 11시, 잡다한 옷감들로 만들어진 가벼운 옷을 걸친 그 모든 젊은 육체들은 그 고원으로부터 내려와, 다채로운 빛깔의 파도처럼 갑자기 모래밭 위에 나타난다.

                                                    알베르 까뮈 철학 에세이, 「미노토르─오랑에서의 체류」 중에서.

 

 

그만 읽어도 좋겠지만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더 심각한 부분이 이어진다는 걸 보여줄 수 있습니다.

 

사막의 석가모니를 생각해 보라. 그는, 사막에서 눈을 하늘에 둔 채 꼼짝 않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몇 년 간을 똑바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신(神)들은 그의 지혜와 돌 같은 숙명을 질투했다. 내밀어진 그의 두 손에다 제비들이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어느 날, 먼 나라들의 부름에 답하여 제비들은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욕망과 의지와 명예와 고뇌를 눌러 왔던 그는 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바위 위에서 꽃이 피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그렇다. 돌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돌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우리가 여러 얼굴들에게서 구하는 그 비밀스러움과 그 광희는 또한 돌에 의해서도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영속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영속될 수 있을 것인가? 여러 얼굴들의 비밀스러움은 시들어 사라지고, 우리는 다시 욕망의 사슬로 되돌아가 있다. 그리고 돌이 우리에게 인간의 가슴보다 더 많은 것을 해 줄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의 가슴만큼은 해 줄 수가 있는 것이다.

「오, 무(無)로 돌아가리라!」 이 커다란 외침은 수천 년 동안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욕망과 고통에 반항하도록 일깨워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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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베르 까뮈, 민희식 옮김,『시지프스의 신화』(육문사, 1993) 부록.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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