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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참 애매한 표현

by 답설재 2012. 11. 20.

'애매한 표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넘어가도 아무 일 없고, 대체로 그게 애매하다고 여기지도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분명 좀 까칠한 사람이다.

까칠하니까 그런 것 그냥 넘겨버리지 못하고, 그냥 넘겨버려야 할 것, 아니면 본래 그런 것,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붙잡고 한참 동안 이리저리 생각해보며 지낸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산티아고 지도는 지도라기보다는 관광안내서에 가까웠다. 안내서에는 외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알아야 할 호텔과 골프장, 버스정류장, 박물관과 쇼핑센터 따위의 위치 등이 표시되어 있었는데 버스정류장 말고는 내게 도움될 것이 없었다. 기다란 칠레 전도에는 산티아고, 탈카Talka, 안토파가스타Antofagasta, 발디비아Valdivia 같은 도시와 그 도시를 이어주는 복잡한 도로망이 표시되어 있었다.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이 있는가 하면 사막이 있었고,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의 평야가 있는가 하면 빙하와 바다가 있었다. 또 4천 킬로미터 서쪽에는 이스터Easter섬과 모아이Moai석상이 있었다.1

 

 

'이상한 표현이라니?'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평범함의 편안함과 상식 같은 것에서 벗어나고 마는 것이다.

"관광안내서에 가까웠다"

"표시되어 있었는데"

"표시되어 있었다"

같은 표현들은, 사실은 당연한 것 같고, 모두들 그렇게 표현하고 있고, 나더러 써보라고 해도 결국 그렇게밖에 나타낼 수 없을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과거형으로 표현되어야 하는지 의문스러웠다.

 

또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이 있는가 하면 사막이 있었고"에서는 '그럼 지금은 사막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인가?' 좀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기야 없어졌을 수도 있긴 하지만……

"이스터 Easter섬과 모아이 Moai석상이 있었다"는 표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럼 지금은 그 섬, 그 석상이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 하기야 어제까지 있었어도 오늘, 지금 이 순간에는 없을 수도 있다.

 

이런 부분에서도 다른 생각을 했다.

 

 

매표소 직원에게서 받은 티켓에는 특이하게도 식탁에서 스테이크를 먹으며 행복해하는 아이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 티켓은 아직까지도 내 사진첩 한구석에 잘 보관되어 있는데 그 아이는 여전히 고기를 먹으며 나를 향해 웃고 있다.2

 

 

"아이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지금도 그려져 있는 것 아닌가? 그 뒤의 문장에서 그렇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 아이는 여전히 고기를 먹으며 나를 향해 웃고 있다"고.

 

수다스럽지만 한 군데만 더 예시하자. 앞으로는 무덤덤하게 읽어 내려가도록 하자.

 

 

하지만 그는 프랜시스 크릭이 패서디나에서 그랬던 것처럼 군사기술에 뛰어난 업적을 남기지도 못했고, 마이클 패서웨이처럼 경력에 도움이 될 만한 인맥을 만들지도 못했다.3

 

 

우선, 프랜시스 크릭은 패서디나에서 군사기술에 뛰어난 업적은 남긴 것인가, 남기지 못한 것인가? 마이클 페서웨이는 경력에 도움이 될 만한 인맥을 만든 것인가, 만들지 못한 것인가?

아마도 프랜시스 크릭은 패서디나에서 군사기술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일 것이다. 아마도 마이클 페서웨이는 경력에 도움이 될 만한 인맥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앞뒤 문장으로 유추해낸 생각이다.

 

 

저는 그 일을 누구보다 잘했습니다. 저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맡은 일을 실패한 적도 없지요. 제가 죽인 사람은 어떤 기록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4

 

 

"저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라는 부분의 뜻은 무엇일까? '맡은 일'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맡은 일'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앞뒤 문장의 뜻을 이어본다면 "저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고, 맡은 일을 실패한 적도 없지요."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살인을 할 적마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려면 그게 합리적인 표현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1. 양준석, 「산타마리아 밀밭길」(단편소설, 『현대문학』 2012년 5월호, 100~101쪽에서 옮김.) [본문으로]
  2. 위의 글, 위의 책, 102쪽. [본문으로]
  3. 손보미, 「과학자의 사랑」(단편소설, 『현대문학』 2012년 6월호, 89쪽에서 옮김.) [본문으로]
  4. 정용준, 「유령」(단편소설, 『현대문학』 2012년 6월호, 122쪽에서 옮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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