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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지금 난 아주 행복해.”

by 답설재 2012. 9. 6.

"지금 난 아주 행복해."

"왜?"

"진짜야."

"왜? 왜 행복한데?"

 

심상대의 중편소설 『단추』에 나오는 대화 장면이다.*

 

이 블로그에, 좀 거창하게, 쑥스럽긴 하지만 결론처럼, '나는 이제 일부러라도 외로움을 받아들여야 한다' '빈 배처럼 스스로 포기하고, 비우고, 맑게 해야 한다' '그렇게 가는 실험대에 나 자신을 올려보면서 그게 좋다는 걸 느낀다'고 썼다가 "그건 좋은 게 아니다." "왜 그렇게 하나" "기쁨과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충고를 받은 적이 있다.

 

기쁨과 행복? 객관적으로 보기에 나는 지금 불행하다는 건가? 만약 나 스스로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썼더라면, "당신이 그 상태로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는 말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에 대한 결론은, 신(神)이 내려다 보시기엔 그 신이 내려 주고 싶은 건지 모르지만, 그러므로 그 신에겐 미안한 말씀이 될지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적어도 나 자신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일조차 그에게 의지해야 한다면, 그럼 도대체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이다. 말하자면 쓰레기통 옆에 앉아 있어도 내가 행복하다면 그만인 것 아닌가 싶은 것이다. 왜 그걸 나 아닌 존재가 책임져야 하거나 그 권한을 행사해야 하는가. 권위? 남에게 드러내 놓고 말하기는 난처하지만 마음속으로야 "필요하다면 부처도 죽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분노 같은 걸 갈아앉히고 백번 양보하는 마음으로 돌아오면 이런 생각은 할 수 있다. '이 따위 블로그에 행복하다느니 어떻다느니 써놓아서 사람들이 오며가며 읽어보게 하고 있는 것이 한심하고 치졸한 일일 지도 모르겠다.'

 

 

 

나는 곧 잠자리에 들어야 할 늦은 밤 시간에 특히 행복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행복이 뭔지도 모를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느냐?"고 따지고 든다면, "그럼 그때 하루하루가 감사하다는 강한 느낌을 갖는다"고 대답하면 좋을 것이다.

 

아내와 함께 두어 편의 TV 드라마를 보거나, 헬스를 다녀와 함께 뉴스를 좀 보면 벌써 10시가 넘게 된다. 전에는 나 스스로도 "저건 바보상자니 뭐니" 하며 그렇게 앉아 있는 시간을 참 한심하다고 여겼으나, 이제는 흔히 아내와 함께 그렇게 앉아 있을 수 있는 그 시간이 고맙다는 느낌을 가진다.

그렇다고 해서 할일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밤은 깊어 가지만 언제나 그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은 많다는 느낌을 갖는다. 심지어 신문을 덜 봤을 때도 있고, 검토할 자료가 있기도 하고, 블로그에 누가 다녀갔는지 확인하고 싶기도 하다.

 

라디오로는 궁색해서, 비싼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CD를 넣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오디오를 구입하고 싶어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버리지 않고 모아 놓은 CD만 해도 백 장은 넘지 싶다. 사실은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 옛날식 전축을 처분해버리면서 가진 꿈이 그것이었다. 밤이 깊으면 그 꿈을 떠올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러다가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말지도 모르지만 그 꿈은 아직 그대로 있다.

 

그렇다고 절대로 그냥 누워자고 싶지는 않다. 혼자 창밖의 보안등을 오래오래 내다보거나 건너편 아파트를 바라보는 일도 정말이지 너무나 좋아한다. 거의 매일 밤 그렇게 한다.

또 잠시라도 책은 꼭 읽어야 한다. 읽다만 책은 몇 권이고, 한 번은 읽어야 할 책, 다시 읽고 싶은 책은 얼마나 많은가.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을 남겨두고 잠들어야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다. 이쪽으로 이사 와서는 달빛이 들어오는 방안에서 자리에 누울 수 있다는 것이 천금(千金)처럼 고맙다. 달밤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게 잠들면서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낀다.

 

겨우 그게 행복한 이유냐고 묻거나, 그런 이유로 어떻게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든다 해도 다른 이유를 댈 수가 없다.

나는 건강이 좋지 못하다. 가슴이 답답해질까봐 조바심을 가질 때가 많고, 좀 오래 앉아 있다가 일어서면 엉치가 아파서 걸음을 겨우 걸을 때도 흔하다. 자고 일어날 때도 스트레칭을 충분히 해야 움직이기가 좋다.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은, 그새 체력이 떨어져 늦게 귀가하는 시간이 매우 힘들고 벅차기가 일쑤여서 약속을 하기가 두렵다. 그럼에도 이렇게 숨을 쉬며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나에게는 재산이라고 할 것도 거의 없다. 오해할까봐 제대로 말하면, 그리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다가 무슨 큰일이 생기면 어쩌나?' 아내는 늘 초조해하고, 나 또한 돈이 없어서 '나중에 한번 해봐야지' 하고 생각한 것을 이루어본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다. 누가 밥을 한 번 사면 나는 두 번을 사고 싶어 안달이 난다.

 

아이들도 하는 일을 보면 세 명 다 아직 멀었다. 그러나 각자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다.

 

그렇게 설명해도 행복하다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면 할 수가 없다. 부끄럽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신(神)의 사자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면, 신은 이 정도로써 만족하는 인간을 혐오하는 걸까?'

 

 

 

그 소설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홍련아, 정말이야!"

…(중략)…

읽고 있던 책갈피에 손가락을 끼운 채 전화하면서 민우는 줄기차게 자신의 꿈을 변호했다. …(중략)… 그래서 행복하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은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이 두렵지 않고, 가난이 두렵지 않으므로 탐욕에 빠지지 않아도 되며, 자신이 탐욕하지 않으므로 타인의 탐욕에 조롱당하거나 지배받을 이유가 없을뿐더러, 자신은 저항할 이유도 상대도 없다고 그는 말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가난을 탐욕에 대한 저항이라고 여기겠지만, 사실은 저항이 아니라 자립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탐내지 않으므로 타인의 탐욕에 대한 호기심도 없고 원망도 없으므로 구걸하거나 비굴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가난하지만 원망하지 않는 게 아니라 가난하므로 원망할 이유가 없다고 민우는 말했다.

"그래?"

 

행복하다고 하면 행복한 것이다.

 

 

 

지난 6월 17일, 영국 민간 싱크탱크 신경제재단(NEF)에 따르면 151개국을 대상으로 삶의 만족도와 기대수명, 환경오염 지표 등을 평가해 국가별 행복지수(HPI)를 산출한 결과, 코스타리카가 총 64점으로 지난 2009년에 이어 1위에 올랐고, 이어 베트남이 2위(60.4)였으며, 그 다음은 콜롬비아 3위(59.8), 벨리즈 4위(59.3), 엘살바도르 5위(58.9) 등의 순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내총생산(GDP) 1위인 미국은 거의 하위권인 105위였고, 영국은 40위(47.9), 프랑스는 50위(46.5), 일본은 45위(47.5), 독일은 46위(47.2), 한국은 63위(43.8)에 그쳤다고 한다.**

 

"국민소득이 10,000달러가 되려면 아득한 나라, 심지어 아직 1,000달러도 되지 않는 코스타리카나 베트남 따위의 나라가 감히 뭘 행복이니 뭐니 하는가!, 불교 따위를 믿는 국민이 70%가 넘는 나라가 무슨 행복을 이야기하는가! 그것도 행복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는 일 아닌가!(비록 어쭙잖은 글이지만 스님이 아니고 땡땡이중이라면 이 글 읽고 부디 미소짓는 일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강심에 꽂혀 있던 해가 강 아래로 뚝 떨어지자 하늘은 더욱 붉게 타오르며 강을 벌겋게 물들였다. 성수대교를 지나는 시내버스 창가에 앉아, 민우는 한강에 떨어져 부서지는 석양의 잔광을 눈시울을 조리며 바라보았다. 세상은 자신의 온몸에 불꽃을 쏟아부으며 소멸의 시간을 영접하고 있었다. 민우는 자신이 왜 행복한지, 이러한 평화의 이유가 무엇인지 누구에겐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는 혼자였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지금은 누구를 찾아 나서기엔 마땅한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밤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 심상대 『단추』(중편소설) 『현대문학』 2011년 12월호와 2012년 1월호 연재.

** 2012.6.17.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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