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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그림과 사진

눈(眼)

by 답설재 2010. 10. 27.

 

교과서를 만드는 데는 수많은 유의점이 있습니다. 다른 책도 아니고 교과서니까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지만 무지무지 힘드는 일입니다.  가령 사진 한 장을 쓰려면 100장, 200장을 인화해봐야 그 한 장을 고를 수 있을 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사회과 편수관을 하면서 사진에는 꼭 사람이 들어가야 한다는 걸 강조했습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사진이 보이면 '달력 사진' '죽은 사진'이라면서 비아냥거렸습니다.  숭례문 사진이라면 그 사진에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그 숭례문의 규모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이 들어가 있는 사진을 보면 아이들이 그 사진에 나타난 것의 성격을 파악하는 단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령 옛날의 구리거울이라든지 호미, 낫 같은 생활도구의 생김새만을 강조하는 그림이나 사진에는 사람이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저에게는 그것조차 유감이었습니다.

 

아래 사진 <구름 속에서 Ⅰ>(아, 멋진 제목!)에는 사람이 보입니까? 작가의 자녀가 잠자리를 잡는 모습이랍니다.

 

 

 

구름 속에서 Ⅰ

 

 

 

 

이 블로그의 <작별>이라는 코너에 「우리는 그를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글이 있습니다(어느 장학사가 결코 부끄러워하지 마라고 했지만, 이 글을 이야기하려니까 다시 부끄러워집니다). 그 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이 써준 글입니다.  그 글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만났던 것을 행운이라고 한다. 그러나 톤이 높지도 않은 그의 말을 들으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교사를 힘들고 바쁘도록 해서 아이들도 덩달아 바쁘게 했다. 가령, 체험학습 사진전을 하자고 해서 사진을 모으고 심사를 했다. 그는 심사 결과를 보여주자 두 번이나 “심사가 잘되지 못했다. 아이들이 심사하면 이 작품을 대상으로 뽑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세 번째의 심사를 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학부모의 입김이 스며든 작품, 학부모가 대필해 준 사진설명을 구분하게 되었다. 교사가 애써서 세련되고 멋지게 고쳐준 사진 제목 ‘여름날 원두막에서’보다 아이가 붙인 제목 ‘수박 먹기’가 더 좋은 제목이니까 차라리 그냥 두는 것이 옳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가 명단만 제출하면 시상을 허락하는 교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스스로 “서류에 사인이나 하는 교장 노릇이 싫다”고 하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그럴 때의 그는 아이들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이야기하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우리가 머릿속에 아이들을 넣고 이야기하면 그는 신이 나서 대화를 이어가게 해주었다.

 

그때 그 사진전 심사 때문에 울었던, 제가 울게 했던, 그리고 우리가 헤어질 때도 울었던 선생님들 중의 한 명이 바로 이 사진을 제작한 그 멋진 선생님입니다.

그때는 제가 교장이라고 이 작가를 울렸으니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미안한 일입니다. 일들이 대개 이러니까 저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노을 속에서 Ⅰ

 

 

 

여름날 풍경 Ⅰ

 

 

 

Ⅲ 

 

이 작가의 닉네임은 <소나무와 별>입니다. 어느 곳 사진전에서 그 이름이 보이거든 '아, 그때 파란편지를 쓰는 그 사람이 이야기한 그 작가구나!' 하시면 진짜로 소나무와 별이 보일 것입니다.

 

<소나무와 별>이라면 두 가지는 어떤 관계일까요?

제 생각에는 그 소나무가 반짝거리는 별들을 보호해 주는 관계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강인하고도 섬세한 잎새 사이에 별들을 품고 그 반짝거리는 아름다움을 보호해 주는 소나무.

그러므로 별들은, 이 싸늘한 늦가을 밤에도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들은, 우리가 꽁꽁 얼어붙은 날씨가 너무 춥다고 이불을 뒤집어쓴 겨울밤에도, 그렇게 반짝이고 그 반짝임을 지켜보면서 지낼 것입니다. 긴긴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