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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우리 교과서의 정체성

by 답설재 2010. 6. 13.

 

 

  한국교과서연구재단에서는 『교과서연구』라는 저널을 계간으로 발행하고 있습니다. 이 책 여름호에 제가 다음과 같은 권두언을 썼습니다.

  편집기획회의에서는 교육과학기술부장관을 지낸 어느 대학교 총장에게 권두언을 부탁하기로 했는데, 예상은 좀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고, 한 교육연구소 대표에게도 부탁해봤지만 역시 거절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제가 쓴 글입니다. 왜 거절했을까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유명한 책이 아니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저로서는 생각은 호기로운데, 막상 글을 쓰려고 하면 그 호기로움이 사라집니다. 교육이나 학문에 대한 소양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배울 때 잘 배우고 배울 만큼 배워야 글도 제대로 쓸 수 있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과서의 정체성

 

                                                                                                                                         

                                                                                                                                                           ○○○(본지 편집기획위원장)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학교가 아이들을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몇 시간이나 가르치면 만족하게 될까. 우리나라 학생들이 공부에 투입하는 시간이 OECD 평균보다 하루에 3시간이나 더 많다는데도 왜 항의를 하지 않는 것일까. 더 궁금한 것이 있다. 우리 교육은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초·중등학교의 교육내용에 대해 기초·기본이 되는 내용을 중심으로 철저히 주입하고 암기시키는 일에 몰두해야 하고 사고력이나 창의력 같은 건 우연에 맡기거나 무시해도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주장할 수도 없다. 그렇게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는 사고력이나 창의력 같은 이른바 고등정신기능을 함양하는 교육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지 기초·기본이 되는 내용을 주입·암기시키는 따위의 교육은 가정이나 학원에 맡겨도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주장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나라 학교교육이 지식의 주입·암기에 치중한다는 비판을 시작한지 너무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이제는 그것을 문제 삼는 일 자체가 식상하기도 해서 그 이야기조차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이미 30년 전『제3의 물결』(1980)에서 ‘시간엄수, 복종, 기계적인 반복 작업이 현대 산업사회 교육의 맹점’이라고 주장한 앨빈 토플러는, “풀빵 찍듯 하는 교육”(2007) “밤 11시까지 가르치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 교육”(2008)이라며 우리 교육을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또 있다. 교육부(2000)에서도 한때 교육적 지식은 “정태적인 관조적 지식만이 아니라 역동적인 실행적 지식과 균형을 이루어 통합되어야” 하고, “언어나 기호로써 표현된 이론적 체제와 같이 메마른 경험의 결정체가 아니라, 전인적 관심, 정열적 탐구, 진지한 신념, 그리고 체질화된 암묵적 수준을 포괄하는 총체적 경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적이 있고, 그동안 이러한 해석을 수정한 적도 없다.

 

  사고력이나 창의력도 기초·기본이 되는 지식으로부터 우러나온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있거나 그러한 교육을 받아서 그러한 방법에 의한 경험 외의 경험은 전혀 없는 경우라면, 읽고 쓰고 외운 지식을 한 치의 오차 없이 평가한 결과를 봐야 “이게 교육과 학습의 분명한 결과!”라며 속시원해할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주입식 암기교육으로 “갈 데까지 가보자!”는 세력이다. 가령 2010학년도 대학입시에서 어떤 대학들은, 심지어 조교들을 동원해 기계적으로 수능·내신·출결 점수를 단순 합산하는 방법으로 학생을 뽑아 놓고도 ‘입학사정관제’를 빙자했다고 한다. “뭐니 뭐니 해도 객관식 점수가 미덥다”고 했을 그 기막힌 사례에 대해서도 우리는 또 “일부 대학일 뿐”이라는 식의 위안을 찾고 지나가게 될 것이다.

 

  그 ‘점수’라는 것 앞에서 얼마나 더 초라해져야 ‘입학사정관제’ 같은 걸 진정성을 가지고 실천할 수 있게 될는지 아득한 느낌을 갖는다. 우리가 교육에서 추구해야 할 ‘지식’은 그런 지식이 아니라는 지적을 생각하면 초조해지기도 한다. 인공지능학자 로저 샨크(2002)는 이렇게 썼다. “지난 세기와 그 이전의 수많은 세기 동안, 교육을 받는다는 것, 따라서 지성을 갖춘다는 것은 사실의 축적,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인용하는 능력, 어떤 관념에 익숙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교육은 정보의 축적을 의미했고, 대중이 생각하는 지성이란 자신이 축적한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것에 불과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 사실들이 (컴퓨터에 의해 자동으로) 벽에 씌어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그런 날이 오면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 그는 이렇게 예언하기도 했다. “우리가 아직 교사와 교실과 교과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50년 뒤에는 거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돌이켜보면서 우리가 교육개념을 바꾸는 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왜 수능성적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왜 답을 암기하는 것이 지능의 증거라고 생각했는지 물을 것이다.”

 

  그 변화에 50년이 필요하다면 또 “아직은 이 방법으로 가르쳐보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꼭 수능점수 1, 2점을 따져야 하겠다는 환경에서라면 ‘자기주도 학습능력’ ‘수준별 수업’ ‘교과교실 수업’ 같은 방법이 잘 먹혀들 리가 없다. 많이 설명하고 많이 암기시키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투입할수록 유리하다면, 거기에 무슨 교육논리나 학습원리가 필요하겠는가. 그렇게 가르치고 공부시키는 데 교과서와 문제집 외의 무슨 자료가 필요하고, 학교와 학원에서의 교육이 서로 차별화되어야 할 뚜렷한 이유가 있겠는가.

 

  교육과학기술부에서는 ‘교과서 선진화 방안’을 발표하고, 이 방안으로써 우리 교과서가 보다 "쉽고, 재미있고, 학생들에게 친근한 미래형 교과서"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기대에서 “보다 쉽고, 재미있고, 친근한 교과서”는 어떤 수업, 어떤 학습 상황을 염두에 둔 가정일까. 우리가 그릴 수 있는 이른바 ‘미래형 교과서’는 수능대비방송이나 일류 학원의 강사처럼 유창하게 설명하는 수업, 그 설명을 감탄하며 경청한 후에 들은 내용에 대한 ‘묻고답하기’에 유용한 교과서인가, 아니면 주어진 혹은 스스로 설정한 학습과제에 따라 “지식과 정보를 평가하고, 선택하고, 조직하고, 활용하고, 생산하고, 재구성하는 데 관련된 능력을 더욱 중시”하는 수업(교육부, 2000)에 유용한 교과서인가.

 

  지식과 정보의 단순한 전달·수용에 핵심적 역할을 해온 우리 교과서가 이제는 진정한 교육혁신의 핵심적 역할을 하는 교과서로 선진화하기를 기원해야 할 시기이다.

 

 

  위에서 보셨지만, 저는 이 책 『교과서연구』지의 편집기획위원장입니다. 이 책에 사회 저명인사의 글도 싣고 싶은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만들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축구선수 박지성이나 피겨선수 김연아, 성악가 조수미, 영화감독 이창동, 삼성회장 이건희, 카이스트 총장 서남표 같은 사람들의 「교과서와 나」라는 제목의 글을 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제목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글 아니겠습니까.

  시도하면 될 것 같지만, 우선 연락처를 알아내는 일만 해도 만만치는 않고, 언젠가 홍명보 감독에게 연락하려고 했더니 중간에서 당장 차단해버리더랍니다. "그런 데는 관심없다"는 게 이유지만, 본인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과서와 나', 저명인사는 아니라 하더라도 누가 한 번 멋진 글을 써보시면 어떨까요.

 

 

                  

           비매품으로 보급되는 『교과서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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