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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가끔 절에 가서

by 답설재 2010. 5. 21.

아침에 P 씨에게서 전화가 오더니 다짜고짜 “절에 가지 않습니까?” 하고 난 뒤 본론을 꺼냅니다.

그 전화를 받고 생각난 L씨에게 전화를 했더니 교회에 다니는 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에 오르지 못하면, 속리산 법주사는 평지에 있잖아요. 대전까지 KTX 타고 오면 거기서 한 시간 만에 법주사에 데려다 줄게요.”

아내에게 사람들이 내게 절 이야기를 꺼내는 게 이상하다고 했더니 석가탄신일이기 때문이지 별 뜻이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절에 가본 지도 오래됐지만, 『보고 읽고 생각하는 아이로 키우자』는, 지금 생각해도 참 이상한 제목의 졸저에 실었던 그 원고가 생각났습니다.

 

 

 

 

 

가끔 절에 가서

 

 

 

“누구네는 예수를 믿어 살림이 어떻게 되었다네”, “아비에게 어떻게 대하고, 제 할아비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네”……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기 때문인지 지금까지 성당이나 교회 한번 나가보지 못했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가까이에 교회도 성당도 없는 심심산골이어서 그런 곳에는 나가려야 나갈 수도 없었다. 속마음을 이야기하면, 크리스마스만 되면 선물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갔다는 누구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듣거나, 성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쓴 글을 읽으면, 흡사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나 시골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사람을 대할 때처럼 무언가 주눅이 들고, 평생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의 정서나 사고는 어떤 것일지 신비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꼭 그러한 부러움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남들이 교회, 성당을 찾을 때, 때로는 절에 가본다. 그것이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도리를 하는 길이라는 생각도 좀은 한다. 처음에는 절에 가서 넙죽넙죽 절을 하며 빌었다. ‘부처님,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젊어서 돌아가시지 않도록 해 주시고, (일곱 명이나 되는 동생들과 그 가족들을 얼른얼른 생각해내면서) 누구는 사업 잘 되어 잘 살게 해주시고, 누구는 요즘 부부간이 좋지 않다는데 좀 말려주시고, 누구는 자식이 곧 학교에 가게 되었다는데 건강하게 공부 잘하도록 해주시고, (다음에는 드디어 내 가족 한 명 한 명을 차례로 생각해내면서) 제 아내 건강하게 해주시고, 맏이가 이제 마음 즐겁게 먹고 공부에 마음을 붙이게 해주시고, 둘째는 성적을 올려 그 수준에서는 가장 좋은 대학에 가게 해주시고, 막내 놈은 아직도 공부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있는데 제발 하루속히 제자리를 잡게 해주시고, (끝으로 나 자신을 챙기며) 별 탈 없이 직장 생활을 하도록 해주십시오. “ 그리고는 이처럼 절을 찾아 부처님께 돈도 좀 바치고 절까지 하며 소원을 빌었다는 자부심(?)으로 그 절의 온갖 곳을 흡사 내 집처럼 싸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 절에 가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느니 어떠니 하는 소리도 들었는데, 문득 부처님을 찾아가 절하는 사람이 나처럼 이렇게 시주는 조금 하면서 여러 가지를 골고루 빌고 빌면 그 소원을 어떻게 다 들어주겠나 싶어서 여러 가지 소원을 비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이렇게 빌었다. “부처님, 구체적으로 빌지 않겠습니다. 다만 부디 제가 좀 착한 놈이 되도록 해주십시오(‘내가 착한 놈이 되면 당연히 내 가족도 저절로 득을 보겠지.’).”

 

그러다가 또 어느 날, 이것도 다 부질없는 욕심이지 싶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부처님 앞에 한 달에 한 번 정도도 나타나지 않는 주제에 ‘착한 놈’이라니, 부처님이 보시기에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는 이렇게 빌게 되었다. “부처님, 모든 것을 부처님 뜻대로 하십시오. 다만, 잘못한 일들은 당장은 안 되더라도 두고두고 뉘우치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을 심판하지 마시고, 두고 보아 주십시오.”

 

그렇지만 부처님은 다 알고 계실 것이다. ‘부처님은 이렇게만 빌어도 내가 이미 전에 빌고 빈 것들을 다 기억하실 것이다. 내가 이렇게 빌어 어느 날 착해지면 전에 기원한 것들을 다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음흉함, 혹은 내숭을 모르실 리 없을 것이다. 그건 내 마음의 변화가 잘 증명하고 있다. 문득 이렇게 빌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부처님, 저는 그렇다 치고, 또 앞으로는 착한 놈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고, 제 아내, 제 아들딸도 착하여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행복한 가족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감히 부처님 앞에서, 주머니의 돈을 계산하여 천 원짜리 한두 장만 꺼내놓는, 때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낼 때는 무슨 대견스러운 일이나 한 듯 자랑스러워하는, 그러므로 어리석고도 약아빠진, 결코 착하지 않은, 내 수많은 기원 중에서 어떤 것을 부탁드리는 것이 좋을지 온갖 계산을 다해 보다가 이제는 이것저것 부지런히 빌지도 않고 약삭빠르게 ‘착하게’ 해 달라고 가장 핵심적인 것을 가려 기원하며 절을 해대는 이 인간에게도 기회는 있을까. 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에게도 ‘말씀’이 들리는 수가 있을까. ‘이웃의 닭 우는 소리가 부처님의 설법처럼 들린다’는 말씀은 왜 있는 것일까. 진실한 신자에게는 이루어질 수 있지만 보통 사람은 상상도 되지 않으므로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것일까, 아니면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에게도 이와 같은 말씀을 전함으로써, 착해지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경거망동은 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일까. 인디언들의 영적 스승인 매튜 킹은 이렇게 말했단다.

 

“지혜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산에 올라가 신과 대화해. 물론 당신들도 산에 올라가 신과 대화할 수 있지. 우리는 곰산에 올라가. 그리고 나흘 낮과 밤 동안 물과 음식 없이 지내지. 당신들은 당신들이 좋아하는 산에 올라가면 돼. 그곳에 가서 당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게. 그곳에서는 아무도 당신들이 하는 말을 엿듣지 않아. 그곳에서는 당신들과 신만 있거든. 그밖에 아무도 없어. 신과 대화한다는 것은 굉장한 거야. 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 그 또한 기도거든.”(김광일,「문학 전문가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현대문학』2003년 5월호, 307).

 

그러나 초라한 마음을 가진 나와 같은 인간에게는 아무리 귀 기울여도 차라리 말씀 아니 계신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그 말씀 없으심이 또한 얼마나 깊으신 것인가. 끝까지 희망은 지닐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이므로.

 

내가 일찍부터 신자(信者)가 되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좀 나아져 있을까. 어릴 때부터 평생을 교회나 성당에 나가고 있는 사람들은 그 긴 세월 얼마나 많이 배웠고, 얼마나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을까. 진실한 마음의 기도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온갖 못된 짓을 다 하며 보낸 우리의 하굣길, 그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성당에 한번 나와 보라고 부탁하시던, 우리가 돌멩이를 던지며 무어라 욕설을 해대어도 그냥 웃기만 하시던, 너무나 고와서 다가갈 수 없으므로 오히려 욕설을 퍼부어 주고 싶던, 그 수녀님은 아직도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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