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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국격(國格)

by 답설재 2010. 2. 2.

 

 

국격(國格)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23일 법무부․국민권익위원회․법제처 업무보고장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모두 발언을 했답니다.1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국격보다 세계가 생각하는 우리의 국격이 매우 높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높아졌다. 국격은 경제력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분야가 선진화돼야 한다는 측면에서 그 기본은 법질서가 지켜지고 도덕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도층부터 공직자, 고위직, 정치를 포함해서 지도자급의 비리, 이런 것들을 없애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대통령이 그 발언을 한 그 즈음은, G20 정상회의 서울 개최 결정, 아랍에미리트 원전(400억 달러?) 수주 성공, 무역 흑자 409억 8천만 달러 및 수출 순위 세계 9위 기록 등 우리나라의 경제적 위상을 가늠할 수 있는 고무적인(충격적이기도 한) 뉴스들이 줄을 이을 때였습니다.

 

국격(國格)이란 말은 지금까지 잘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이 대통령이 그렇게 언급한 이후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 되었습니다.2

'국격', 사람에게 인격(人格)이 있듯이 국가에는 '국격'이 있다는 당연한 의미 부여일 것입니다. 좀 안타깝긴 하지만 우리는 물건의 값어치를 흔히 -아무 거리낌없이- '가격(價格)'으로만 따지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고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즉, 국격을 잘못 따지게 되면, 억울한 국가도 있고, 실제보다는 부풀려지는 국가도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가령 KBS TV '진품명품'이란 프로그램에 가지고 나간 가보(家寶)를 저쪽에 앉아 있는 전문가란 사람이 "까짓거 몇 푼 하지 않습니다" 해버리면 얼마나 섭섭하고, 그저 '몇 백 만원이겠지' 한 것이 몇 억원은 되겠다고 하면 입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오늘 아침 신문 1면을 보면서 우리의 그 '국격'이란 것이 정말로 대단하구나 싶었습니다.3

우선 사진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세계 전역에서 작전"…해군, 원양 기동전단 창설」, 사진 아래에는 이런 설명이 붙었습니다(사진도 보여드리면 좋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우리 해군이 그동안 한반도 근해에서 주로 활동하던 연안해군에서 벗어나 세계 전역에서 작전을 펴는 대양해군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해군은 1일 부산 해군작전사ㅓ에서 우리 해군 최초의 원양 기동전단인 제7기동전단 창설식을 가졌다. 기동전단의 주축인 한국형 구축함 '왕건함'과 첫 이지스함인 '세종대왕함'과 '최영함'이 작전사 부두에 정박해 있다.'

 

그뿐 아닙니다. 하단의 두 기사도 '국격'과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빌 게이츠·한국 '질병백신개발 지원' 손잡는다」(부제 : 게이츠 제안, 이 대통령 수용). 기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이 지난달 29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기간 중 만나, 백신개발 및 보급 사업을 하고 있는 국제백신연구소(IVI)에 대한 공동 지원방안을 논의했다고 청와대가 1일 밝혔다. …(후략)…'

 

다음으로,「수출 47%, 수입도 27% 늘어-'불황형 흑자 구조' 탈피 조짐」이란 기사도 희망적입니다. 이렇게 시작됩니다. '새해 들어 우리나라의 수출·수입이 모두 큰 폭으로 늘면서 '불황형 흑자(경기 침체에 따른 수입 감소로 흑자 발생)' 구조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후략)…' 기사 옆에는 '월별 전년 대비 수출·수입 증감률' 도표가 붙어 있습니다.

참고로, 1면의 다른 기사는,「애플 '아이패드' 공개 나흘만에… 아마존 "전자책 콘텐츠 가격 올려주겠다"」와「現重노조 "전임자 3분의 1 줄이겠다" '노동 2010체제'의 첫발」이라는 기사(NEWS & VIEW)였습니다.

 

이 대통령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국격보다 세계가 생각하는 우리의 국격이 매우 높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높아졌다"고 전제하고, "국격은 경제력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니며, 모든 분야가 선진화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대통령이 언급한 국격의 조건 중에서 우리나라가 잘 갖춘 분야는 어떤 것일까요. 우리나라의 국격이 우리도 모르는 새 그렇게 높아졌다는 데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긍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나라의 국격이 뭐 그리 높을까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대통령도 그랬지 않습니까? 모든 분야가 선진화돼야 한다고. 다른 분야는 그야말로 ‘개차반’인데4 돈만 많은 경우, 그것이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라면 어떤 인격의 인간이겠습니까. 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인간과 상종하게 될까봐 걱정스럽고, 가능하면 그런 인간과 상종하지 않고 지낼 수 있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왜 있지 않습니까. 외식을 하러 식당에 가면 제 새끼 데리고 와서 거기가 마치 제 궁전인양 노는 놈들이나 공중목욕탕에서 제 궁전의 풀장인 양 노는 것들, 학교를 무슨 제 아들딸 놀이터나 되는 줄 아는 꼴불견들, ……. 그런 것들 다 열거해서 뭐 합니까. 속만 끓어오르지요.

 

그러면 그런 '개차반'을 생산하지 않는데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교육자들입니다. 교육이란 직장을 구해주는 일도 아니고, 시험점수 높여주는 일도 아니며, 바로 인격을 높여주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밤 10시 이후의 학원교습을 막는 일에 '학파라치'를 동원하는 나라의 교육자들이며, 우리들 중 누군가가 엉망일 때 그걸 고발하는 이른바 '교파라치'에게 1억원을 주겠다는 교육청의 지휘, 지도를 받아야 하는 나라의 교육자들입니다. 학교는 인격을 높여주는 곳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학원이 하는 사교육과 '사생결단'이라도 벌여야 할 정도의 공교육 대 사교육의 대결구도 속에 '묵묵히' 지내고 있는 교육자들입니다.

 

교육의 본질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모르는 교육자는 하나도 없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걸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교육자들이라는 데 허탈감만 느끼면서, 가장 적극적인 교육은 그래도 우리는 굳건한 의지로 '그런 꼴불견' '그런 망나니' '그런 것들'이 생산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데는 소홀하고, 이렇게 주장해봐야 공감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에이, 그런 공염불 같은 소리!" 해버리는 현실이 슬플 뿐입니다.

 

인격의 총합이 국격을 이룬다고 주장하면 잘못된 것일까요? 대통령도 강조하지 않았습니까? "법질서가 지켜지고 도덕이 지켜져야 한다"고.

 

 

 

 

  1. 『문화일보』, 2009. 12. 26. 19면「사람과 말」에서. [본문으로]
  2. 2010. 2. 2. 오늘자 문화일보 1면에서도「'국격 까먹는' 구호(救護)외교」라는 제목의 기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 [본문으로]
  3. 조선일보, 2010. 2. 2. A1. [본문으로]
  4. 개가 먹는 차반인 똥이라는 뜻으로, 언행이 몹시 더러운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