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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교장실 출입문

by 답설재 2009. 12. 25.

나는 행정실을 통해 교장실을 출입하도록 해놓는데 대해 일단 '권위적인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장이 되었을 때, 교장실 출입문부터 개방했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아예 문을 조금 열어두어 지나가는 교직원이나 아이들이 '아, 교장이 저기 앉아 있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행정실장에게는 '강력한' 부탁을 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기업체에서 온 사람이 교장실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들어오면 그 이유를 실장님께 묻겠습니다."

 

심지어 이 학교에 와서는 행정실장에게 이런 말도 했습니다.

"저는 교장은 기업체에서 오는 사람들을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행정실장이 시시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적어도 교장이 그런 일까지 하는, 그런 직위는 아니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장 임명장은 대통령이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국가에서는 교장이 그런 사람들이나 만나고 그러지 말라고 행정실장을 보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 아이들이나 교직원들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저 문을 드나들 수 있습니다."

 

내 말을 들은 행정실장이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그럼 시시하게 아이들은 왜 만나나?' 그러지는 않겠지요. 학교에 발령 받는 행정실장이 그렇게 시시한 사람들은 아니겠지요.

 

교장실 출입문을 개방한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희한한 일은, 정작 교직원들은 꼭 행정실을 통해서 들어왔고(그렇게 하는 버릇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아이들도 교사들의 안내로 그 행정실을 통해 들어왔는데, 학교에 물건을 판매하는 업체에서 온 사람들은 '교장실 문이 열려 있다니, 그 참 잘 됐다!'는 듯 그야말로 무상으로 출입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행정실을 통해서 들어오라'는 팻말을 붙여놓은 것은 물론이지만, 그들은 기를 쓰고 혹은 귀신같이 그냥 들어오려고 했습니다.

 

 

 

이 학교에서도 당연한 듯 그런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문을 폐쇄하지는 않고 그냥 닫아놓기로 하고, 교직원들에게 "문이 열려 있으니 행정실을 통해서 들어올 필요는 없다"는 걸 알려주었는데도 그들은 대체로 행정실을 통해 들어왔고, 이런저런 일로 학교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백발백중 이 문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입씨름이 벌어집니다.

"문에 써놓은 것을 못 보았습니까?"

 

그렇게 항의하면 대체로 이렇게 말합니다.

"미안합니다.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오늘은 명함 한 장만 드리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그걸 가지고 뭘 그렇게 그러느냐?"고 대어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욱 황당한 경우는, 그런 제 항의는 아예 묵살하고 다짜고짜 제 손을 잡고 악수를 하려는 사람도 있고(그 손에서는 희한한 냄새가 진동하기 마련입니다), 저는 멀뚱하게 서 있는데도 "잠깐 앉아서 이야기하자"며 막무가내로 소파를 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고향이 어디냐?" "그럴 줄 알았다." "내가 이래도 그쪽 출신 누구누구를 잘 알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이러저러한 고위직도 잘 안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떤 부류인지는 말도 하기 싫습니다. 가구점 주인도 있고, 언론인을 빙자하는 치도 있습니다. 심지어 마늘즙 상인도 있고, 무슨 협회 같은 데서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여간 여러 가지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공통된 점은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도 교장실 문을 폐쇄하고 말았습니다. 교직원들이 이렇게 생각할 건 뻔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당신이라고 별 수 있나. 교장은 다 권위적이지. 결국은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다른 교장들은 교장실 출입문을 어떻게 하고 지내는 것일까요? 예를 들면 '칠판 납품 비리, 교장·조달청 공무원 대거 연루…총 49명 검거' 이런 기사에 나오는 교장들 말입니다.1 교장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업체에서 오는 사람이나 누구나 무상 출입하게 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행정실장에게 이렇게 부탁해 놓는 것일까요? "교장에게 은밀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은 살짝 들여보내세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닙니까?"

 

그런 기사를 하나 더 볼까요? 다만 교사가 주인공이 된 기사라서 좀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 뒤에 교장이 웅크리고 있으니 한번 보십시오.

 

교사 A씨는 지난해 3월부터 올해 5월까지 학교가 자격증 시험 장소를 빌려주는 대가로 받은 시설사용료 4422만원을 학교회계에 세입 처리하지 않고 현금으로 관리하면서 이 가운데 교장에게 450만원, 행정실장에게 338만원, 본인이 338만원을 나눠 갖는 등 총 47회에 걸쳐 1127만원을 횡령했다.…(후략)…2

초등학교 교장이 고상하게, 명예롭게 살아가려고 하는 건 얼토당토않은 일이겠지요? 그러나 최소한 교직원들이 보기에 한심하게, 역겹게, 치졸하게, 불쌍하게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해프닝도 벌어졌다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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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품질에 문제 있는 칠판 등 교육기자재를 전국 초중등학교에 납품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대가로 업체에 뒷돈을 받은 학교장과 공무원 등 총 49명이 무더기로 적발됐다.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칠판 납품금액의 25% 상당을 소개비로 받은 알선브로커 26명을 검거하고 그 중 경기 모 초등학교 학교운영위원장 추씨(49) 등 2명에 대해서는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나머지 24명에 대해서는 불구속 형사입건했다. 이들로부터 칠판 등 학교기자재를 구매해 주는 대가로 뇌물을 수수한 현직 학교장 13명 등 교육공무원 18명도 검거했다. 이 중 14명에 대해서는 불구속 형사입건했다. 나머지 4명에 대해서는 관할 교육청에 징계통보했다. …(후략)… (2009. 9. 24, DIP통신 김정태 기자)
2. 문화일보, 2009. 12. 16. 9면,「교사가 학교 시설 사용료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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