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는 캐슬린의 후임으로 지난 9월 1일에 우리 학교에 온 원어민 보조교사입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간 캐슬린과 달리 캐나다 토론토에서 온 남성입니다. 그는 캐슬린과 다른 면모를 보이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캐슬린은 삼겹살을 좋아하고 태권도, 도자기를 열심히 배워서 고마웠지만, 루크는 필리핀 여성과 결혼하여 예쁜 딸을 두었고, 한국음식 중에 못 먹는 것이 아마 한 가지도 없을 것입니다. 청국장이나 뭐나 간에 뭐든지 잘 먹고 빨리 먹고 ‘빡빡’ 긁어서 깨끗이 먹어치우기 때문에 제가 “좀 천천히 먹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더니 어느 날 제가 좀 빨리 먹는 걸 보고 부디 그러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국음식을 뭐든지 잘 먹는 그가 신통하고 고맙기 짝이 없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저는 루크를 만나면 한심한 영어지만 꼭 몇 마디 해보는데 그럴 때 그는 얼마든지 기다려주겠다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들어주고, 사전의 풀이가 신통치 않은 어떤 단어(예: veritas의 성격은 남성인가, 여성인가?)에 대해 물어보면 자세히 설명해주고 그리스어 어원까지 대줍니다.
그의 전공은 정치학과 문화인류학이라는데, 제가 영어를 할 줄 알아서 마음대로 ‘쑤알쑤알’ 할 수 있다면 그와 루스 베네딕트나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야마구치 마사오 등 기라성 같은 문화인류학 정통파들은 물론 그레이엄 핸콕이나 데즈먼드 모리스처럼 재미있는 글을 쓰고 있는 학자들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는 두어 달 동안 제가 “하이!” 하면 자신도 “hi” 하더니 어느 날부턴가 공수(拱手) 자세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얼마 동안 자신의 익살을 보여주는가 싶어 하다가 곧 ‘저 사람이 왜 저러지?’ 하게 되었고, 드디어 그와 접촉이 잦은 어느 교사에게 물어보게 되었는데, “우리는 교장에게 그렇게 인사하지 않는다.”고 했더니 아이들처럼 그렇게 인사하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교사는 또 “저 교장은 내년 2월까지만 근무하고 퇴임을 한다.”고 했더니 “It's sorrow to me.”(?) 하더라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말도 통하지 않는 사이에도 정은 들 수 있는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는 아이들 앞에서 익살스러운 표정을 잘 짓습니다. 영어를 잘 못하면서도 그에게 “hi”하고 인사라도 해보는 아이들이 참 많고, 뭐라고 말을 건네면 허리를 굽히고 그 말을 진지하게 들어줍니다.
그는 또 학습자료를 멋지게 만들고 늘 만듭니다. 한번 우리 학교 영어학습실에 가보십시오. 그는 또 늘 행정실에 와서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복사물을 만듭니다. 행정실 직원은 그가 얼마나 열심히 복사를 하는지 다 압니다.
어느 교육청에서는 교사들의 영어연수를 강화하여 장차 원어민을 다 돌려보내려고 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원어민을 다 돌려보내고 우리끼리 가르치고 배우면 더 교육적일까요? 더 효과적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영어를 좀 덜 배워도 미국이나 캐나다, 뉴질랜드 같은 영어권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고,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인’ 교사에게 “Good morning, Teacher!” 하는 동안 겨우 “hi” 밖에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그 지역 교육감에게 누가 이 말을 좀 전해주면 좋을 것입니다. 또 그럴 때 제가 교장이라면, 학교예산을 어떻게 잘 조정하여 독자적으로라도 원어민 교사를 채용할 것 같습니다.
"루크, 방학이고 이렇게 추운 날 어떻게 지냅니까?"
"부인과 따님은 필리핀에서 돌아왔습니까? 세 가족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건 마지막 명령이고 부탁입니다. 새해에도 우리 아이들 많이 귀여워해 주시고 잘 가르쳐주세요.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있는 아이들 사진만 봐도 저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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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염원아 선생님> "염원아 선생님, 까짓 거 영어중심학교 되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 마세요. 우리 아이들이 즐겁게 배우면 되는 거 아닙니까? 교육은 꼭 폼이 나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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