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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원어민교사 루크

by 답설재 2010. 1. 13.

특유의 익살스런 표정으로 설명하고 있는 루크

 

 

 

루크는 캐슬린의 후임으로 지난 9월 1일에 우리 학교에 온 원어민 보조교사입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간 캐슬린과 달리 캐나다 토론토에서 온 남성입니다. 그는 캐슬린과 다른 면모를 보이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캐슬린은 삼겹살을 좋아하고 태권도, 도자기를 열심히 배워서 고마웠지만, 루크는 필리핀 여성과 결혼하여 예쁜 딸을 두었고, 한국음식 중에 못 먹는 것이 아마 한 가지도 없을 것입니다. 청국장이나 뭐나 간에 뭐든지 잘 먹고 빨리 먹고 ‘빡빡’ 긁어서 깨끗이 먹어치우기 때문에 제가 “좀 천천히 먹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더니 어느 날 제가 좀 빨리 먹는 걸 보고 부디 그러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국음식을 뭐든지 잘 먹는 그가 신통하고 고맙기 짝이 없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저는 루크를 만나면 한심한 영어지만 꼭 몇 마디 해보는데 그럴 때 그는 얼마든지 기다려주겠다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들어주고, 사전의 풀이가 신통치 않은 어떤 단어(예: veritas의 성격은 남성인가, 여성인가?)에 대해 물어보면 자세히 설명해주고 그리스어 어원까지 대줍니다.

그의 전공은 정치학과 문화인류학이라는데, 제가 영어를 할 줄 알아서 마음대로 ‘쑤알쑤알’ 할 수 있다면 그와 루스 베네딕트나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야마구치 마사오 등 기라성 같은 문화인류학 정통파들은 물론 그레이엄 핸콕이나 데즈먼드 모리스처럼 재미있는 글을 쓰고 있는 학자들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는 두어 달 동안 제가 “하이!” 하면 자신도 “hi” 하더니 어느 날부턴가 공수(拱手) 자세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얼마 동안 자신의 익살을 보여주는가 싶어 하다가 곧 ‘저 사람이 왜 저러지?’ 하게 되었고, 드디어 그와 접촉이 잦은 어느 교사에게 물어보게 되었는데, “우리는 교장에게 그렇게 인사하지 않는다.”고 했더니 아이들처럼 그렇게 인사하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교사는 또 “저 교장은 내년 2월까지만 근무하고 퇴임을 한다.”고 했더니 “It's sorrow to me.”(?) 하더라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말도 통하지 않는 사이에도 정은 들 수 있는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는 아이들 앞에서 익살스러운 표정을 잘 짓습니다. 영어를 잘 못하면서도 그에게 “hi”하고 인사라도 해보는 아이들이 참 많고, 뭐라고 말을 건네면 허리를 굽히고 그 말을 진지하게 들어줍니다.

그는 또 학습자료를 멋지게 만들고 늘 만듭니다. 한번 우리 학교 영어학습실에 가보십시오. 그는 또 늘 행정실에 와서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복사물을 만듭니다. 행정실 직원은 그가 얼마나 열심히 복사를 하는지 다 압니다.

 

어느 교육청에서는 교사들의 영어연수를 강화하여 장차 원어민을 다 돌려보내려고 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원어민을 다 돌려보내고 우리끼리 가르치고 배우면 더 교육적일까요? 더 효과적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영어를 좀 덜 배워도 미국이나 캐나다, 뉴질랜드 같은 영어권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고,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인’ 교사에게 “Good morning, Teacher!” 하는 동안 겨우 “hi” 밖에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그 지역 교육감에게 누가 이 말을 좀 전해주면 좋을 것입니다. 또 그럴 때 제가 교장이라면, 학교예산을 어떻게 잘 조정하여 독자적으로라도 원어민 교사를 채용할 것 같습니다.

 

"루크, 방학이고 이렇게 추운 날 어떻게 지냅니까?"

"부인과 따님은 필리핀에서 돌아왔습니까? 세 가족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건 마지막 명령이고 부탁입니다. 새해에도 우리 아이들 많이 귀여워해 주시고 잘 가르쳐주세요.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있는 아이들 사진만 봐도 저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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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염원아 선생님> "염원아 선생님, 까짓 거 영어중심학교 되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 마세요. 우리 아이들이 즐겁게 배우면 되는 거 아닙니까? 교육은 꼭 폼이 나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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