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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낭만에 대하여

by 답설재 2009. 10. 8.

 

 

낭만에 대하여


궂은비 내리는 날 /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 새빨간 립스틱에 /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 내 가슴이 /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붙이니까 당연하다는 듯 최백호의 그 노래가 들립니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현실적이 아니고 환상적이며 공상적인. 또는 그런 것’을 ‘낭만적(浪漫的)’이라고 한다는데, 그것만으로 ‘낭만적’이라는 낱말을 설명하기에는 왠지 좀 미흡한 느낌입니다.

 

지난 8월 28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 있는 모하메드 빈 나예프(Nayef) 왕자의 저택으로 20대 청년이 찾아왔다. 라마단(이슬람교의 금식 기간)을 맞아 사우디 왕족들이 젊은 이슬람교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자택을 개방한 날이었다. 청년은 경호원들의 몸수색과 소지품 검사 등을 모두 통과하고 왕자 앞으로 다가갔다. 왕자가 청년과 악수를 나누려는 순간 청년의 몸이 폭발했다. 왕자는 폭발충격에 뒤로 넘어지고 테러범의 몸에서 분출된 피로 피투성이가 됐다. 다행히 테러범의 몸이 약 70조각으로 찢어지며 폭발충격을 흡수해 준 덕에 왕자는 경미한 부상에 그쳤다. …(중략)… 사우디 왕자의 테러 사건은 세계 테러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엉덩이 폭탄(keister bomb)'에 의한 자살테러였다. …(후략)….1)  

 

 

어떻습니까. 테러범이 폭탄과 기폭장치를 항문을 통해 몸속에 넣는다는 ‘엉덩이 폭탄’은 아무래도 지나쳐 ‘낭만적’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음은 어떻습니까. 같은 신문에서 본 기사입니다.

 

화랑(畵廊) 200여 개가 모여 있어 ‘베이징의 소호(SoHo․미국 뉴욕의 예술 거리)로 불리는 베이징 다산쯔(大山子) 798 예술구’의 한 화랑. 이곳에는 국방색 ‘중산복(中山服․인민복)’을 입고 무릎을 꿇은 채 한 손을 가슴에 얹고 있는 마오쩌둥(毛澤東) 전 국가주석의 동상이 있다. 그런데 목 윗부분 머리는 없다. 동상의 이름은 ‘마오쩌둥의 죄(毛澤東的罪)’. 중국 예술가 가오전(高兟․53)과 가오창(高强․47) 형제가 만들었다. 형제는 “머리 부분은 잘라서 따로 보관하고 있다가 친구들이나 동료들이 오면 붙여서 보여준다”고 말했다. 중국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설명이다. …(후략)….2)

 

공안 당국에 걸리면 큰일나겠지만 일단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그럼, 마지막으로 다음 기사도 좀 보십시오. 역시 그 신문입니다. 말하자면 어제 한 신문에서 세 가지 기사를 인용하게 되었습니다.

 

“차렷! 의원님들께 경례.”6일 국세청 5층 회의실에서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국정감사장. 채경수 서울지방국세청장의 구령에 맞춰 24명의 서울 지역 세무서장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습니다. 절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곧 이어 또 한 차례의 구령이 국감장에 울렸습니다. 왕기현 중부지방국세청장이 채경수 서울청장에 뒤질세라 19명의 세무서장을 일으켜 세운 뒤 “일동 차렷! 의원님들께 경례”라고 구령을 붙이더군요.국감을 받는 정부 부처의 관료들은 한명씩 차례대로 일어나 의원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평소 깊은 애정을 갖고 지도 편달해주시는 존경하는 의원님들에게 국감을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라는 다소 낯뜨거운 인사말을 섞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날 국세청 국감장처럼 구령에 맞춰 단체로 인사를 하는 건 이례적입니다. 국방부나 경찰청 국감이 아니고선 보기 힘든 광경입니다. …(후략)….3)

 

지난 9월 24일, 이 블로그에 실은 ‘<지급> 국정감사와 행정감사 요구자료 제출’이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국세청 감사장 분위기에 관한 위의 기사를 보면, 내가 직접 국정감사를 받는 입장이라면 그런 글을 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국세청 감사를 한 국회의원들은 그런 군대식 혹은 경찰식 경례를 받으면서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요? 국세청 간부라는 사람들이 어떤 의도로 그따위 경례를 붙였는지는 생각도 말고, ‘아, 우리나라 국세청은 참 낭만적이구나!’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덩달아 우리나라 국회의원들도 ‘낭만적’이 될 텐데요. 국회의원들이 낭만적이면 곤란하답니까?

 

최백호의 노래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나는 그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내가 시를 쓰겠다고 덤벼들지 않은 것에 안도감 같은 걸 느꼈습니다.

 

……밤늦은 항구에서 /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 슬픈 뱃고동 소리를 들어보렴 //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서 나처럼 늙어갈까 /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 슬픈 뱃고동 소리를 들어보렴 //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 내 가슴에 /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 낭만에 대하여

 

 


1) 조선일보, 2009년 10월 7일, A14면,「속수무책 ‘엉덩이 폭탄’ 테러 비상」(파리=김홍수 특파원)

2) 위 신문, A16면,「무릎 꿇고 머리 잘리고… 마오쩌둥 조각의 ‘사죄’」(김시현 기자)

3) 위 신문, B3면,「국세청 국감장의 우렁찬 구령소리 ‘차렷! 경례’」(이진석 기자의 ‘뉴스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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