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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드디어 나를 가르치게 된「그 애」

by 답설재 2008. 12. 18.

 

 

 

 

요즘 몇 달째 이른바 '컨디션'이 엉망입니다. 이러다가 영 가는 건 아닌가, 그런 초라한 느낌일 때도 있습니다. 달이 지나도록 병원에 가봤자 별 수 없어서 한의원에 갔더니 한의원답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살았는지, 면역력이 고갈되어 병이 나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만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정말로 힘든데도 두 달 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산에 다녀왔습니다. 부산의 초등학교 교장들이 다 모였는데, 여러 분이 다가와 언제 어떤 인연이 있었다는 걸 밝히며 인사를 해주었습니다.  그 중에는 우리나라 교육과정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 지침을 만들 때 저를 만난 분도 있었고, 우리나라 교과서 역사상 처음으로 지역교과서(사회, 4-1)를 만들 때 함께한 분도 있었고 - 말 그대로 수많은 날 밤을 함께 새운 거지요, '교육'이란 걸 위해. 제게는 밤을 새운 일의 종류가 제법 많습니다.

 

그래서 면역력이 고갈된 걸까요? '교육이란 걸 위해 그랬다'고 해봤자 고깝게 여길 분들이 대부분인 세상에서. 더 훌륭한 일로 밤을 새운 분들이 얼마든지 많은 세상에서. 그분은 곧 정년이라고 했습니다. 아, 세월이여!- 

 

1996년에 함께 일본에 다녀온 분도 있었습니다. 일본 동행은 전국 각 시·도에서 한두 분씩이었는데, 제가 단장이었습니다. 그 기억으로 언젠가 <나가노의 추억>이란 글을 써서 이 블로그에 실은 적이 있습니다. '일본 동행'인 교장이, 그러니까 12년만에 처음 만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은 학교장 칼럼을 왜 안 쓰십니까? <영등포역에서 만난 여인>이 끝이지요?"

 

아, 이런! 인터넷의 힘이 대단하다고 할까요. 우리 학교 홈페이지 '학교장 칼럼'은 읽어본 분의 숫자가 다 나타납니다. 우리 학교 교직원만 해도 모두 합하면 70명이 넘고 학부모는 대충 쳐서 2900명은 되는데도, 그 칼럼 독자는 잘해야 100여 명이고, <영등포역에서 만난 여인>은 그만하면 매력적인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도 독자가 겨우 50여 명이 되어 있습니다. 이 블로그 독자에 비하면 참 한심한 숫자입니다.  저는 이 50여 명의 독자도 그 '일본 동행' 같은 전국의 그런 분들로 채워지고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남양주양지초등학교에 가서 무얼 하는지 홈페이지에 들어가 봅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만 해도 50명은 넘었기 때문입니다. 

 

피곤해서 그런지 아득한 곳에서 돌아와 앉은 것 같은 이 밤, 저는 그 '일본 동행' 같은 눈물겨운 제 동료, 이름없는 제 독자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글을 싣습니다. "요즘은 왜 안 쓰십니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생각하다가 이 글이 생각난 것입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발행하는『교육광장』2008년 겨울호(vol 30)「잊지 못할 제자」라는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그 저널에 처음 생긴 코너인데, 아무나 쓸 수 있는, 쓰기 쉬운 글이니까 저에게 원고청탁을 한 것이 분명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쓴 글입니다.

 

 

 

드디어 나를 가르치게 된「그 애」

 

 

 

살다가 보면, 어처구니없게도 별것 아닌 동네의 별것 아니던 집안에서 태어난 주제에 고시 합격을 해서 무슨 국장 혹은 변호사를 하거나 교수를 하고 있다는 고향 후배 이야기를 듣게 된다. ‘별로 내세울 것 없는 국장이겠지’ ‘수입도 없는 이름 없는 변호사겠지’ ‘강의도 제대로 못해서 빈축이나 사겠지’ 생각해버리면서 스산한 마음을 달랜다.

 

통이 큰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속 좁은 사람으로서는 별 수가 없다.자위도 한다. ‘나도 중앙부처 과장을 했지 않나. 그 부서 과장이야말로 얼마나 힘든 자린 줄 아는 사람은 다 알지 않나. 그것도 내가 하고 싶어 한 게 아니라 어느 날 장관이 일방적으로 정했지 않나.’심지어 중앙부처 과장의 위상에 대한 이런 표현도 눈여겨봐 두었다. “부복 때 모두 엎드려 그쪽으로 촉각을 곤두세워 이를테면 춘양 할배가 일어나는 기척만 살피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서울서 관리를 오래 하며 중앙에서 과장까지 지내고 정년퇴직하여 지난봄에 낙향한 무실의 과장 할배가 홀연히 큰기침을 하면서 일어나는 것이렷다. 이것은 큰 도전이다. 이때 사람들이 평소 춘양 할배가 격식만 많이 따지고 위압적인 것이 불만이었는데 잘됐다고 생각하면 과장 할배를 따라 모두 일어나버린다.”(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창작과비평사, 1997, 142)

 

반면에, 진심으로 흡족해지는 경우는 제자가 잘 됐다는 소식이다. 그런 소식은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 좋은 게 교사로 일생을 마감하게 된 사람의 심리다. 일생을 마감하게 됐다고 했지만, 이 입장이 되면 ‘나는 지금 행복한가? 행복이 뭘까?’ 철학자들조차 모르겠다고 한, 그야말로 ‘본질적인’ 주제에도 매달리게 된다.

 

‘돈이 많다고 행복한 건 아니다. 그렇다고 지위가 높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봐라, 교육감 주제에 검찰 조사를 받다가 물러난 사람이 올해만도 두 명이고, 또 한 명이 조사를 받고 있으며, 국세청장인가 뭔가를 지낸 사람은 교묘한 방법으로 십 수 억짜리 아파트까지 뇌물로 받았다며 조사를 받고 있지 않나?’ ‘아이들이 저렇게 아름다운 걸 보며 살아가는 이 운명, 이 여정(旅程)이 행복한 길이 아닌가?

 

보통사람들은 교원이니까 저런 말을 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게 참말이니 이게 행복 아닌가.’ 그렇다고 교원도 아이들만 쳐다보고 사는 건 아니다. 아이들의 ‘강아지싸움’이 때로는 어른들 ‘진짜싸움’이 되고, 어떻게든 그 싸움을 말려보겠다고 며칠간 자장면 사먹으며 저녁마다 중재해 봐도 별수 없다가 가해자가 몇 천 만원 주겠다니까 봄눈 녹듯 하는 꼴도 봤고, 아파트 창문에 설치해둔 망원경으로 지켜보다가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꼴도 봐야 하고, 태극기가 까매졌는데도 갈아달지 않았다거나 교문의 현수막 글자가 이상하다고 교육청에 일러주는 사람도 봐야 하는 게 교원이다.

 

그러던 한 봄날, 어느 고등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가르친 그 N이 만나자고 했다. 그도 선생이 되었다는 말에 왠지 가슴부터 ‘철렁’ 했다. 무슨 비밀이 밝혀진 것 같았고, 이어서 ‘이 길이 만만치 않은데…… 어쩌다가…… 그러나 어쩌랴, 이미 되었다는데……. 미안하구나.’ 까닭 없이 그런 느낌도 가졌다.

 

그 여자애는 저쪽 뒤에서 말이 없었다. 내 앞에 설 일이란 싸웠을 때뿐이었지만, 그렇게라면 몇 번 불려온 아이였다. 가족구성 문제가 마음을 아프게 했던가? 그때 내가 에릭 시걸의『남자,여자 그리고 아이』같은 소설이라도 읽었었다면, 세상의 모든 가정은 모두 달라서 더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나는 그 아이에게 ‘구체적으로’ 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도 나도 교사가 되어 ‘스승의 날’을 기념하는 만남이 이루어졌다. 우리의 대화는 때로는 담임과 제자, 때로는 교사와 교사 관계로 이루어졌다. 초등학교 이후에도 많이 싸웠다고 했다. 그러나 싸우면서도 ‘이 일은 일기(日記)에 뭐라고 써야 하나?’ 생각했다고 했다. 일기쓰기에 대해 내 얘기는 하지 않았다. ‘내가 일기쓰기지도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나?’

 

대화는 교사와 교사간의 얘기로 이어졌다. “그래, 힘들지?” 그의 대답이 예상 외였다. “그렇지요, 뭐. 그러니까 우리가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아하, 그래! 힘들지 않다면 왜 자격증을 주고 맡기겠는가. 얘들아, 싸우지 마라, 하면 졸업할 때까지 싸우지 않고, 얘들아, 일기를 써라, 하면 졸업할 때까지 일기를 잘 쓴다면 누가 힘들다고 하겠나.

 

이렇게 간단한 것을 40년을 몸담고도 몰랐다니……. 모른 채 지내다가 제자한테 듣고 비로소 깨닫게 되다니…….그렇게 나를 가르친 그가 올봄에는 내 블로그를 찾아와 이렇게 썼다. “정신 차려보면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무슨 짓들을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든다고 과학 선생이 얘기했어요. 카이스트 연구원으로 있다가 ‘사람’ 소리가 듣고 싶어서 교사가 되었다는 그의 몰골이 귀신에 홀려 정신이 반은 나간 것 같았어요. 선생님! 사는 게 뭐 이런가요? 어린 날엔 어른이 되면 다 이룰 것만 같았고, 교사가 되어서는 연륜이 쌓이면 더 잘 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최선을 다해 살면 뭔가 근사한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는데……. 그 선생이 그러데요, 참 쓸쓸하다고.”

 

‘그러나 너는 무조건 훌륭하다’며 이번에는 내가 위로를 보냈고, 아이들이 교사들을 조롱하는 것처럼 대어들고 그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우리는 ‘사랑’으로 가르쳐야 하고, 그러면 따르지 않을 아이가 없다고 단언하고, 부정적․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아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안쓰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덧붙였다. “너의 에너지가 고갈되어간다면 내 것이라도, 내게 남은 것이 있다면 그거라도 가지고 가라. 드디어 '근사한'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기를 기대한다.” 그가 그랬을까? ‘이 정도라면 다음엔 내가 위로해주고 가르쳐줄 일이 또 있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