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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파란편지 모음 2

책 사러 가기, 책 고르기

by 답설재 2007. 8. 29.

성복 학부모님께 드리는 파란편지 92

 

 

 

책 사러 가기, 책 고르기

 

 

 

  지난 주 금요일, 출장을 가려고 교문을 나서다가 한두 권씩 책을 들고 들어오는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어느 반 아이들이 가까운 서점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책 사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 아이야 거의 없겠지만, 반 친구들 전체가 선생님과 함께 서점에 가본 일은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저에게는 책을 사는 일이 은밀하고 사치스런 즐거움입니다. 겨우 1만원 안팎 혹은 몇 만원의 돈을 쓰면서도 늘 '내가 이렇게 해도 되나' 싶은 호사스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한 느낌을 주는 것은, 교보문고 같은 큰 서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책을 고르는, 혹은 아이는 아이대로 책갈피에 정신이 팔려 있고 엄마는 엄마대로 책에 파묻혀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모습이 참으로 부럽고, 아름답고, 그래서 한평생 일상에만 골몰하도록 내버려둔 아내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책을 사는가?'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가장 실용적인 견해의 하나로, 언젠가 소개해드린 적이 있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헝가리 출신, 캘리포니아 클레어몬트 대학원 경영학 교수,『몰입의 즐거움』)의 글에서 인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참 재미있게 썼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반드시 '책 똑똑이'가 아니라 해도, 근면하고 정직하며 사교적이고 덕이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여겨졌지만, 지금은 추상적인 추론 능력이 물질적 성공이나 사회적 성공의 전제 조건이 되고 있다. 만일 이런 형질을 유전적으로 강화할 방법을 찾아낸다면, 그 추세는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될지 모른다."(존 브록만 편, 『앞으로 50년』중의 「과학이 만드는 행복」이란 글에서).

 

  그러나 우리가 '내 아이의 추상적인 추론 능력'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골라 주고 읽기를 강요하거나, 의사에게 가서 "내가 낳을 아이의 유전형질을 추상적 추론 능력이 강하도록 해주세요." 한다면 매우 잔인한 일이 될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대부분 '아, 이 책이 재미있겠구나.' 혹은 '읽어볼 만하겠구나.' 싶은 책을 골랐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서점에 가서 딱 한 권의 책을 사게 된다면 어떤 책을 고르시겠습니까? 무엇에 관한 책을 사시겠습니까? 평소에 그 책을 한번 봤으면 싶은 책이 있습니까? 필요한 책이 있다면 독서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한 권이 아니라도 좋을 것입니다. 언젠가 학교에서 가까운  마트에 갔다가 어떤 아주머니가 이 책 저 책을 제목만 보고 뽑아서 카트로 훌쩍훌쩍 던져 넣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유심히 엿보았더니 그 중에는 그분이 읽을 만한 책도 있었고 더러 어린이용 도서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도 부러웠습니다.

  '아, 저 분은 저렇게 책을 사고 그 책들을 읽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사는구나.'

 

  그렇게 구입한 책들을 당장 읽어야 한다는 욕심을 부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조바심, 부담감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 지겨워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책이란 물건은 가구와 같은 성격도 지니고 있어서 가지런히 정리해 두기만 해도 보기에 좋기 때문입니다. 또, 보기만 좋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둔 책들의 등표지만 쳐다봐도 어느새 마음이 더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서점에 함께 가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분명히 책을 잘 읽지 않는 경우입니다. 필요한 책이 있다면, 당연히 그걸 사면 그만일 것입니다. 그 내용에 관한 책이 여러 가지라면 그 중에서 제일 쉽게 쓴 책, 만만한 책을 고르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흔히 책 날개에 표시되어 있는 저자의 프로필도 보고, 뒷표지에 소개되어 있는 그 책의 주요 내용이나 부분 인용도 읽어보고, 어느 한 페이지를 펴 죽 읽어보면서 '나를 위해 쓴 책이 맞는가?'라는 관점으로 검토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저자가 그의 온 삶을 나타낸 것인가?', '지겹지 않겠는가?', '읽고 난 다음에 보관해둘 만한 책인가?', 혹은 '그 내용이 아이의 교과서에 나오는 책인가?' 등 실제적인 여러 가지 관점으로 검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실천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 저의 경우에는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여간해서는 선택하지 않습니다. 좀 잘난 체하는 걸까요? 아무나 공감할 책이라면 그렇게 수준 높은 책은 아니지 않는가, 뭐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기 전에 ∼' 혹은 '  에 관한 몇 가지', '하룻밤에 읽는 ∼'(하룻밤에 읽을 정도라면 별 수 없는 책이겠지요), '∼ 사람은  %가 다르다'(나의  %도 분명히 값진 것입니다), 또 가령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로버트 풀검) 같은 멋있는 제목을 패러디하거나 본뜬 제목 같은 책도 좀처럼 사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내용은 좋은데 출판사가 그런 제목을 붙여서 값어치 없게 된 경우도 있겠지요.

 

  교문에서 저를 만나 자신이 고른 책을 자랑하던 그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천진난만한 그 표정들은 우리의 무한한 자랑이며 희망이며, 제대로 표현하면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2007년 7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