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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토성의 고리5

아름다운 오후의 쓸쓸한 장례식 W. G. 제발트의 소설 『토성의 고리』는 그냥 재미 삼아 쓴 소설은 아니었다. 순전히 우수(憂愁)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독후감을 쓰긴 했지만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 그 석연치 않음으로 우수의 사례를 옮겨 써 보자 싶었는데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골라놓은 것이 우선 옮겨 쓰기에는 너무 길었다. 어쩔 수 없어서 발췌를 해보았는데, 그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버려서 제목도 저렇게 '아름다운 오후의 쓸쓸한 장례식'이라고 아버지 이야기에 따르게 되었다. 1862년 끝여름 무렵 마담 에벨리나 코르제니오프스키는 당시 다섯 살이 채 되지 않은 아들 테오도르 조지프 콘래드를 데리고 포돌리아(지금은 우끄라이나 서부지역으로 당시는 러시아령 폴란드였다)의 작은 도시 치토미르를 떠나 바르샤바로 갔다. 문학활.. 2022. 5. 7.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지 못하고 나는 작별인사를 하러 왔어요(I have come to say goodbye)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녀의 옷과 마찬가지로 붉고 차양이 넓은, 순례자가 쓰는 모자 비슷한 것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내가 그녀 바로 옆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주 멀리 있는 듯 느껴졌다. 그녀의 멍한 눈길이 나를 관통하여 뒤쪽으로 나아갔다. 제 주소와 전화번호를 남겨 놓았으니 언제든 원하시면...(I haveleft my address and telephone number, so that if you ever want...) 나는 문장을 완성할 수 없었고,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도 몰랐다. 카타리나 또한 내 말을 듣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언젠가(At one point),라고 운을 떼더니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 말.. 2022. 4. 27.
W. G. 제발트 《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장편소설 《토성의 고리》 이재영 옮김, 창비 2011 한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던 1992년 8월, 다소 방대한 작업을 끝낸 뒤 나는 내 안에 번져가던 공허감에서 벗어나고자 영국 동부의 써픽 카운티로 도보여행을 떠났다.(10) 이렇게 시작된다. 파괴와 고통, 희생 같은 것들로 점철되어온 역사를 슬픔으로 바라본 기록이다.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은 죽어갔고 폐허, 파괴의 흔적만 남아 있다. 보이는 것마다 공포와 공허, 덧없음, 우울을 보여준다. 슬픔은 끝이 없다. '토성의 고리'? 우리 모두는 우리의 유래와 희망이 미리 그려놓은 똑같은 길을 따라 차례차례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우연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일어난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할수록 나는 점점 더 자주 나를 엄.. 2022. 3. 25.
나는 어디에 있을까 여기에 있을 땐 이곳 이 시간이 현실로 다가옵니다. 지난 시간, 그곳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나를 떠올리기도 하고 다시 그곳에서 그렇게 있을 나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당연히 이곳 이 시간이 나의 중심입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곳에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앉아 있던 그곳 그 시간이 중심인지도 모릅니다. 거기서도 오랜 시간 이곳에서의 나를 떠올리며 그런 시간이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고 있을 나를 떠올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어느 곳 어느 시간이 현재이고 과거나 미래인지 알 수가 없게 됩니다. 시간 감각 장소 감각이 무디어진 까닭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 자신이 무너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과정에서 시간 의식간에 충돌이 일어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토성의 고리》라.. 2022. 3. 21.
문서 더미 지금은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때, 아니 오랫동안 문서 더미에 둘러싸여 지내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는 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게 지내는 사람을 부러워하긴 합니다. W. G. 제발트의 소설 『토성의 고리』를 읽고 있는데 '진도'가 나가지를 않습니다. 읽은 데를 또 읽고 또 읽고 하니까 그렇습니다. 이상도 하지요, 그런데도 짜증이 나거나 하지 않고 새로 읽을 때마다 뭘 좀 더 파악하게 되는 것이 재미있고 신기합니다. 1장에서 다음 부분을 보고 여기에 옮겨두고 싶었습니다. 나는 저녁 무렵에 재닌의 사무실에서 플로베르의 세계관에 대해 그녀와 자주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거기엔 강의를 위한 메모와 편지, 온갖 종류의 문서들이 엄청나게 널려 있어서 종이의 홍수에 파묻힌 기.. 2020. 10. 20.